시놉시스
땅지기 카메린은 오늘의 황혼이 평소보다 유독 더 붉은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비공정 도시인 '이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많은 사람으로 분주했지만,
곳곳에서 들려오는 경고의 소식들을 계속해서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미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카메린은 저도 모르게 땀이 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가진 땅지기로서의 소명은, 단순히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해의 땅지기인 슈므가 알려준 상황은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카메린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덮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대규모의 선단이 이내의 상공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카메린! 여기 있었구나."
"테아스 님. 저게 블루호크의 솔리다리스인가요?"
"그래. 장관이네."
"용케 레이론을 설득하셨군요."
"백해의 땅지기에게 상황을 전달받았으니까. 요격대도 저들이 이내로 오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지."
이내를 지키는 요격대는 평소라면 해적인 블루호크가 이내 근처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테아스의 말처럼, 지금의 상황은 그런 요격대가 규칙을 바꿀 정도로 심각했다.
하늘에 가득했던 비공정들이 사라지고도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는 카메린에게, 테아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카메린. 달이 잠긴 호수의 연락도 끊기고 말았어."
"혈광촌에 이어서 달이 잠긴 호수까지 결국..."
요괴들에게 빼앗긴 애쥬어 메인을 되찾기 위해 돌아온 블루호크.
일렁이는 군도에서 흘러오는 죽음의 관조자들에 대한 불길한 소문.
그리고 공해 아래, 환란의 땅에서 일렁이는 위험.
피할 수 없는 변화는, 언제나 준비할 틈도 없이 거대한 해일처럼 덮쳐온다.
"우선 블루호크를 만나요. 그들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 듣는 것이 우선이에요."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늘어지게 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 이 순간이,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점이라는 것도.
카메린은 곧바로 요격대 주둔지로 향했다.
죽음의 여신전
무결한 죽음 비시마
무결함.
글자가 눈앞에 아로새겨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국..."
표정이 굳어진다. 잠시 눈을 감는다.
허탈했다.
드디어 정(情)을 주고 싶은 이가, 삶의 이유인 이가 생겼는데.
실소였을까? 웃음이 픽 나오고 말았다.
하고 싶지 않은 말들로 날 합리화한다.
"죽음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순리이니..."
'아니, 나는 짊어지고 싶지 않아.'
"무결함 역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순리..."
'무결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죽음의 관조자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마음속 깊숙한 곳에 기쁨을 가둔다.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슬픔을 가둔다.
가슴속의 저릿함이 사라졌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나를 가둔다.
다정했던 존재가 사라졌다.
"나는 이제 무결한 죽음."
'다정했던 비시마는 죽었어.'
나는 '죽음'을 맞이했다.
무결한 죽음의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 흘러내렸다.
한기로 가득한 성소의 공기는 그것을 차갑게 식혔고, 곧 얼룩이 되어 볼에 새겨졌다.
무결한 죽음은 그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런 감정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침묵의 성소를 나섰다.
모두가 무결함을 찬미했고,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한 소녀가 보였다.
자신을 향해 기쁜 듯 손을 흔드는, 이토록 아름답고 눈부신 소녀가.차가운 눈빛을 소녀에게 날렸다.
소녀가 짐짓 놀라는 눈치로 움츠러들었다.
미안해.
흥미조차 없다는 듯 소녀에게서 차가운 시선을 거두었다.
볼에 새겨진 자국이 아파왔다.다정한 죽음 세니르
'다정함'
글자가 눈앞에서 흐려졌다.
그렇게 소녀의 다정함은 시작되었다.
"왜..."
드러난 글자가 사라지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눈앞이 뿌옇게 되었다.
허탈했다.
드디어 삶의 이유를 준 이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허탈함에 그저 눈앞이 더욱 흐려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계속 부정한다.
"다정하면... 안 되는데."
"비시마의 미소를 봐야 하는데..."
마음을 다잡는다. 나만의 무결함을 위해.
마음속 깊숙한 곳에 기쁨을 가둔다.
감히 가둘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진 기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슬픔을 가둔다.
허술한 마음의 감옥을 빠져나온 눈물이 얼굴을 가득 적셨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나를 가둔다.
무결할 수 없었던 마음은 결코 소녀를 가둘 수 없다.
"나는 무결할 거야."
'아니, 나는 무결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내려진 '죽음'을 맞이하지 않겠노라 되뇌던 소녀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무결함 속에 다정함을 가두었다.모독의 루브라
고혹적인 달빛이 창문 틈새로 흘러들었다.
어두운 방의 중심에 선 여인은, 마치 어둠 자체에서 태어난 것만 같다는 인상을 줬다.
아름다운 윤곽 속에 섬뜩함이 얽혀있는 모습의 그녀는, 이윽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단 한걸음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너는 이미 내 목소리를 들었지. 그렇지 않니?"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고, 매혹적이었다.
달콤한 유혹,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가 그녀를 거부하라 외치고 있었다.
이윽고 심장이 뻐근해지는 고통이 찾아왔다.
"거부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녀가 앞에 멈춰 섰다.
그저 팔을 뻗어 뺨을 어루만졌을 뿐이지만, 거대한 뱀을 마주한 것처럼 온몸이 굳었다.
"네 눈에 비칠 갈망을 더는 숨길 수 없을 테니까."
그 달콤한 말에 숨기려 했던 갈망이 희미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유혹하듯 뒤에서 감싸 안으며 다시 속삭였다.
"네게 줄 고통은 선물과 같단다."
이 목소리를, 이 손길을 뿌리쳐야 함을 알았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뻐근하게 뛰던 심장이 점점 고통스러워졌고, 그 고동 속에서 알 수 없는 갈망이 그녀를 통해 투영되었다.
거부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의식 깊은 곳에서 경고가 울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의 손길과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드문드문 정신이 들 때마다 그 알 수 없는 갈망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래. 내 선물을 받으렴."
어느새 고통은 사라지고, 달콤한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둥지 짓는 베로로
너의 그 볼품없고 지저분하게 돋아난 깃털도
누군가에게는 그 그림자만으로 겁에 질리게 하고
날개를 펼칠 때마다 뿜어내는 성가신 바람도
누군가에게는 버틸 수 없는 폭풍처럼 느껴지겠지.
그래, 작은 아이야. 먹고, 자는 것 말고는 모르는
한심하고 나약한 아이. 만들어진 실패작인 아이.
너에게도 기회를 한번 주도록 해야겠지.
둥지를 틀고, 깃털을 뿌리고, 마음껏 날뛰도록 해.
그렇게 해서 증명해 보렴.
내가 너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이야.
흉조 카미락
카미락은 겁쟁이였다.
다른 요수들보다 힘이 강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약한 자를 만나면 철저히 굴복시켜 수족으로 만들고
강자를 만나면 하염없이 비굴한 모습을 보이다 방심할 때를 노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요괴에게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카미락은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더 신중하게 파악하고 움직여야겠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세력에 자신감이 붙은 건지
카미락은 당당하게 외쳤다.
"크히히힛! 뭐야, 너 혼자냐?"
"......"
대답이 없었다. 카미락은 불안해지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너! 여긴 우리 구역이라고!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
"이이..."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카미락은 어쩐지 화가 났다.
이미 강자와 약자를 정확히 구분하고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그의 신중함은 온데간데없는 듯했다.
"얘들아! 저 녀석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말을 끝마치자마자 몇몇이 달려들었지만, 이내 굳어버리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분노의 감정이 빠르게 식으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카미락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자세히 보니 요괴의 손에는 처음 만났을 때는 보이지 않던 어떤 물건이 들려있었다.
심장이었다.
"하암, 귀찮네. 일일이 꺼내는 것도 지겨운데."
마침내 요괴가 입을 열었다.
카미락은 재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흐음... 그래도 꼴에 대장이라는 거니?"
카미락은 노려보던 눈을 낮춘 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 살려만 주십시오! 이 녀석들은 전부 죽이셔도 좋습니다!"
잠깐의 정적.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후후... 여기 있는 녀석들을 전부 죽여도 좋다고?"
"예... 예!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나머지 놈들은..."
순간 날카로운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카미락은 말을 끝맺기 전에 소리에 놀라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브라를 둘러싸고 있던 부하들이 어느샌가 전부 두 동강이 난 채 땅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히... 히익!"
"재밌네. 너, 기회를 한번 주도록 할게."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시켜주세요!"
"그래, 그럼... 저런 덜떨어진 녀석들을 모아봐. 찾아야 할 곳이 좀 있는데, 조금 넓어서 말이야."
"예! 예... 그, 그런데 방금 제 부하들을 전부 다 잘라버리셨..."
말 없는 눈빛이 차갑게 카미락을 짓눌렀다.
"아... 아닙니다!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걸신들린 타이고
"땅에 박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 따위, 내 상대가 되지 못하지."
"벌써 싸움을 포기한 건가? 뭘 이렇게 던져대는 거야?"
"이건... 뭐지? 뭔가 맛있는 냄새가..."
"하나만 먹어볼까... 딱 하나만..."
"생각보다 맛있네..."
"어? 잠시만... 나 아직 덜 먹었어..."
"그래, 이것까지만 먹고..."
"하나만 더..."
"하나만..."
"......"
"나... 뭘 하고 있었지?"
"아..."
"아... 그래그래, 개럿에 바칠 먹잇감을 찾고 있었지."
"조금만 기다려 개럿... 으흐흐..."
추락하는 오스트리
그 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절벽.
오스트리는 어느 부유섬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수천, 아니 수만 번에 시도 끝에 이번만큼은 성공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캭!"
절벽에서 힘차게 발돋움한 것도 잠시, 오스트리의 작은 날개는 그의 육중한 몸을 이끌고 하늘을 날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크라라락!!!"
한없이 추락하는 오스트리, 결국 낮은 고도에 있던 또 다른 부유섬에 떨어졌다.
오늘도 실패였다. 수많은 추락에 몸도 점점 적응했는지, 제일 먼저 땅에 박은 뿔은 이제 아프지도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힘차게 날개를 퍼덕이는데도 왜 나는 저 하늘을 날고 있는 일각수들처럼 비행할 수 없는 걸까.
"크앙..."
오스트리는 추락했던 부유섬에 주저앉아 저 하늘 멀리의 일각수의 행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날고 싶은데, 나도 저렇게 하늘과 바람을 느끼고 싶은데, 나도...
"배고파..."
생각은 딱히 깊게 이어지지 않았다. 오스트리는 주변에 먹을 것이 없나 살피기 시작했다.
마침 저 멀리 건너편 부유섬에 움직이는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오스트리 같은 덩치 큰 요수가 보이면 도망치는 게 보통이겠지만, 작은 날개를 퍼덕이다 추락하는 걸 본 이들은 건너편 부유섬에서 그저 오스트리를 비웃고 있었다.
오스트리가 절대로 부유섬을 날아서 건너오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하지도 못한 게 있었다.
오스트리의 진짜 강점은 장식처럼 달려있는 작은 날개가 아닌...
"고기?"
강력하게 발달한 다리에서 나오는 각력이란걸.
"고기 발견!"
커다란 덩치의 요수가 단순히 다리힘만으로 부유섬 사이를 도약해서 건너오는 장면.
착지할 때의 충격을 활용해 목표를 향해 빠르게 돌진하는 장면.
큼지막하게 벌린 오스트리의 입안 속의 장면.
그리고 그들에겐 더 이상 다음 장면이 보이지 않았다.
애쥬어 메인
일각수 크라켄
또 한 번 여정의 길로 나아가매
깊은 안개 속 몸을 뉘인 그대 앞에 고하니라.
허락되지 않은 길은 가려지고,
그대의 숨결만이 우리를 이끌리라.
하늘을 찢고 구름을 쫓는 위대한 창의 주인.
물결 속에 감춰진 고요한 그대의 분노.
그 침묵 앞에서 조심스레 기도하리라.
거친 파도 속에 숨어든 심장.
폭풍의 잠 속에 누운 존재여.
그대의 눈을 감추시고,
우리에게 길을 허락하소서.
그대의 깊은 잠 속,
길을 잃은 자들을 굽어살피소서.
그대가 잠든 바다 속에서
우리는 고요히 지나가리라.
-뱃사람의 노래
폭음 크래시머
"크래시머..."
멜리오나의 부름에도 크래시머는 묵묵히 창밖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례 없던 엄청난 수의 요괴들이 마치 먹구름처럼 애쥬어 메인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선장과 대장이 애쥬어 메인을 맡긴 이후, 그는 쉼 없이 긴 시간 동안 모두의 집을 지켜냈다.
끝도 없는 요괴들과의 싸움.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의 한가운데에 선 지금.
그놈의 감이란 녀석은 얄궂게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들었다.
크래시머는 몸을 돌려 멜리오나를 바라보았다.
"조타실은 이미 점령당한 건가? 훌리즈는..."
멜리오나는 고개를 가로저은 뒤, 불안한 듯 몇 번이고 옷깃을 매만졌다.
"가라. 멜리오나. 열쇠를 찾아! 그리고, 훌리즈와 함께 끝까지 임무를 수행해."
청해의 심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거대한 철문의 손잡이 위로 거대한 두 팔이 얹어졌다.
긴 시간 함께해온 동료이기에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말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듯했다.
멜리오나는 떠나려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크래시머를 바라보았다.
"대장 허락 없이 죽으면 안돼요... 크래시머."
크래시머는 짧게 웃어 보이고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닫았다.
거대한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닫혀가는 문의 틈새로 멜리오나의 뒷모습이 작아져 갔다.
요괴들의 비명과 다급한 외침들도 함께 잦아들어 이윽고 청해의 심장에는 고요만이 내려앉았다.
짧은 고요 속, 크래시머는 조금 전부터 느껴졌던 미세한 진동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곧이어 잠깐의 적막을 비웃듯 셀 수 없이 많은 촉수들이 바닥을 뚫고 공간을 가득 채웠다.
"크라켄마저 손에 넣은 건가, 요괴 놈들."
곧이어 거대한 촉수들이 크래시머를 덮쳐왔다.
크래시머는 자세를 가다듬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거대한 주먹을 내질렀다.
찰나의 순간, 빠르지만 가볍지 않고, 단단하지만 유려한 그 공격은 이미 촉수들에 닿아있었다.
곧 공간을 찢을듯한 폭음이 들려오며, 크라켄의 촉수가 터져나갔다.
"가져가 봐라."
솟아오른 크라켄의 촉수들이 마치 자신을 죄어오는 창살처럼 느껴졌다.
크래시머는 애쥬어 메인의 엔진인 청해의 심장 바로 위에 자세를 낮추고 자리 잡았다.
청해의 심장의 점멸하는 푸른 빛이 자신을 감싸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까진, 무엇도 내어주지 않는다."
닻 내리는 훌리즈
시야가 서서히 녹색 빛으로 물들어 갔다.
젖어 들어가는 시선 속,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풍경의 조각이 남겨진 시간을 말해 주는 듯했다.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었다.
'대장은... 아직 인가...'
'멜리오나, 어서 열쇠를...'
'애쥬어 메인이 이내로 향하게 둘 순 없어. 닻을 내려야 해.'
피의 흐름이 수십 배는 빨라진 느낌이 들었다.
함께 싸우던 이들의 함성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막아선 문고리에서 미처 손을 떼지 못한 채 쓰려진 동료가 눈에 들어왔다.
곧 태어날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뻐하던 그 녀석일 것이다.
'대장... 아직...'
'멜리오나...'
'애쥬어 메인이... 닻을 내려야 해.'
날아든 요괴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곧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쳐부순 요괴들의 피가 고여 생긴 웅덩이 위로 얼굴이 비쳤다.
이렇게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여전히 기다리는 이들은 오지 않는다.
아직은, 조금은 더. 기다려 볼 참이었다.
'대장...'
'멜리오나...'
'닻을 내려야 해.'
온 세상이 녹색으로 잠겨버렸다.
바닥에 등을 맞대고 몸을 뉘었다.
하늘은 녹색. 낮과 밤의 구분조차 사라진 세상이었다.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내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워나갔다.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싸우고 있지.
무엇을 지키고 있지.
그래... 나는...
'닻을... 내려야 해...'
......
'닻을 ...내려야 해...'
발버둥치는 멜리오나
'열쇠가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텐데...!'
동료들과 함께 요괴들을 처리하며, 멜리오나는 다음 계획을 진행하기 위한 열쇠를 찾아 돌아다녔다.
운이 없게도 열쇠가 걸려있던 장소가 처음 요괴들의 공격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탓이었다.
'왜 하필 무너져도 그곳이... 윽...'
끝없이 퍼지는 요기에 의해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멜리오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그리고 다행히, 잔해 끄트머리에 떨어져 있는 열쇠를 찾는 데 성공했다.
열쇠를 집어 든 멜리오나는 벨트에 걸어놓은 후, 바로 훌리즈가 있을 조타실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아윽...."
머리 속에서 큰 고통을 느끼며, 멜리오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유지했던 미스트 기어가, 오염된 탓이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안 돼... 어떻게든 열쇠만은, 전달해야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멜리오나의 몸은 더 이상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미스트 기어 연동을... 해제할... 걸...'
머리 속으로 엄청난 양의 요기가 밀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생각을 이어가는 것조차 벅찼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빨리... 열쇠를...'
'...열쇠를 훌리즈에게... 건네야...'
이후 점점 시야가 녹색으로 물들면서 완전히 흐려지기 시작했고.
'...열쇠를, 훌리즈에게...'
그대로 멜리오나의 의식은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요살자 레이론
특별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직접 건조한 첫 번째 배가 출항에 나서는 날.
남자는 긴장된 목소리로 배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배의 이름은 '아르카디아'. 내가 바라는 모든 이상향을 담았어."
언젠가 자신처럼 훌륭한 조선공이 되겠다며 따라나선 동생의 눈빛이 반짝였다.
꿈을 이룬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동경. 남자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 끝에는 언제나 비극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다.
남자에게도 비극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 전례 없던 요괴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소규모의 전투는 언제든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도저히 감당할 정도의 숫자가 아니었다.
"요괴다! 모두 준비해!"
이 배를 띄우기 위해 보냈던 인고의 시간들이 무색하게 요괴들은 남자가 이룬 것들을 철저히 짓밟았다.
생전 무기를 쥐어보지 않았던 이들의 저항은 요괴들의 맹공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꿈을 두드리던 망치는 요괴들의 피로 물들어갔고, 희망을 묶던 밧줄은 적의 숨통을 조였다.
치열한 전투의 순간 속, 남자는 요괴의 발톱의 동생의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것을 마주했다.
동경에 가득 차 반짝이던 눈빛이 초점을 잃고 흐려져 갔다.
"안 돼!"
외침은 파도에 삼켜졌고, 이상향을 꿈꾸던 배는 온통 피와 절망으로 물들였다.
남자는 살아남았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동료들의 기척도, 동생의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요괴들은 홀로 남은 남자를 포위했다.
남자는 부르튼 손으로 화살 하나를 쥐었다.
더 이상 구부려지지 않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려왔다.
안간힘을 다해 주먹을 쥐었다. 고정되지 않는 손은 찢어진 옷자락으로 싸맸다.
남자는 활을 쥔 손으로 수없이 요괴들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몇이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수의 요괴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져 나갔다.
요괴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남자는 그로부터 전해지는 온기에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찢어 죽여도 모자랄 것들에게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다니.
동틀 녘까지 이어진 싸움에 끝엔,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거친 숨소리 섞인 울먹임만이 남아있었다.
"......"
레이론은 상념 속에서 빠져나와 발걸음을 내디뎠다.
잿빛 하늘 아래로 깔린 차가운 갑판의 나무 바닥이 레이론의 무거운 발걸음을 받아냈다.
내딛는 걸음마다 오늘을 위해 포기했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촉망받던 조선공으로서의 삶.
행복했던 가족들과의 기억.
잃을까 두려워 스스로 놓아버린 연인의 손.
돌아서는 자신을 붙잡았던 마지막 온기.
출항의 시간.
'공허의 추락' 이라 불리는 요괴들의 습격.
그날 많은 이들은 소중한 것을 잃었다.
못과 망치를 쥐던 손엔 거대한 크로스 보우와 날카로운 검이 들려있다.
이상향을 꿈꾸던 배는 잔혹한 짐승이 되어 요괴들의 심장을 꿰뚫을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곁엔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크루얼 비스트 위에 선 누구도 내일을 갈망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잔혹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회로 조합가 네리모
소녀의 고향은, 풍부한 마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마법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것들이 마법으로 해결된 탓에 그녀 또한 '기계'라는 것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소녀는 중천에서 온 상인이 가져온 한 발명품을 보게 되었다.
발명품 자체는 간단했다. 버튼을 누르면 따뜻한 불이 나오는, 난로라 불리는 것.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발명품을 처음 본 순간, 소녀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 같았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이 나오게 되는 원리는 무엇일까?
기계란 어떻게 작동되는 방식이기에 안개의 힘을 담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안개의 힘을 발동시키는 구조는 마법과 같을까?
그도 아니라면, 안개의 힘을 발동시키기 위한 새로운 구조로 짜여 있는 걸까?
소녀는 그 난로를 분해하며, 그것을 만들어 낸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다시 만들어보며, 똑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지 재조립을 해보았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지만, 소녀는 즐거움을 느꼈다.
마법을 배울 때처럼 빠르게 늘어나는 실력에 큰 성취감을 느꼈다 .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분해해 버렸던 난로를 다시 원상복구 시켰을 때,
"해냈다아!"
소녀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고, 그것을 기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푹 빠져 버렸다.
이후 소녀는 스스로 대단한 발명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소녀를 발명가들의 성지. 약속의 도시 이내로 이끌었다.
그렇게 소녀, 네리모의 꿈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철면의 언믹
그때, 그날의 꿈을 꾸지 않은 밤이 얼마나 될까?
"아직... 아직 완전히 변하지 않았어! 구할 수 있어! 구할 수 있다고!"
"위험해! 언믹!"
꿈속의 자신은 이번에도 인귀가 되어가는 소중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달린다.
그리고 인귀가 되어버린 동료들에게 온몸을 물어뜯기고 찢긴다.
"...허억!"
격한 호흡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오늘도 온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동시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 올라온다.
하지만 언믹은 입술을 짓이기며, 소리 없이 그 통증을 견뎌낸다.
"...젠장, 이 망할 놈의 꿈은 언제까지 계속 꾸게 되는 건지."
크게 심호흡을 한 언믹은 기계로 교체되지 않은 부분의 상처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후 언제나처럼 마스크를 쓰고, 벽에 기대어 놓은 대검을 어깨에 걸쳐 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힘을 주기 위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다고 우울해질 내가 아닌데 말이야! 크하하핫!"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의 신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언믹은, 이제는 없는 동료들과 찍은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처럼 또다시 동료를 잃지 않기 위해, 전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달이 잠긴 호수
적아 울라드
“크앙...”
어느 어린 신수가 오래된 그물 덫에 걸려 꼼짝도 못 하고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크게 울어도 자신이 외톨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길잡이 강은 별내림 숲과 달이 잠긴 호수에 비해 많은 신수가 살지 못했다.
이어진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요괴와 험난한 지형은 신수가 편히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신수들은 있긴 했다. 어린 신수의 무리도 그러했다.
요괴들이 그들의 무리를 몰살시키기 전까지 말이다.
어린 신수는 혼자 천운으로 살아남았지만, 그리 기쁘지 않았다.
도망치다 생긴 상처와 굶주림이 점점 심해진 것도 있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
“베즐로! 여기 신수가 걸려 있어! 어린 녀석 같은데?”
눈이 감기려던 찰나, 어린 신수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곧 황금빛 칼날이 어린 신수의 시야를 가리던 낡은 그물망을 베어냈다.
길잡이 강에서 가끔 보았던 '인간들'이었다.
“진작에 오래된 덫은 치우라니까, 애먼 어린 신수만 죽을 뻔했잖아.”
인간들이 어린 신수에게 다가왔다. 아마 베즐로라는 게 저 인간의 이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지난번 요괴들에게 당했던 녀석들 새끼 같은데."
베즐로라는 인간은 어린 신수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밀려온 다정한 온기에 순식간에 어린 신수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꿈에서 어린 신수는 자신의 무리에게 달려갔지만,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꿈이 꿈이라는 걸 자각한 어린 신수는 목 놓아 울었다.
“어이고야. 서럽게도 우네.”
그제야 어린 신수는 눈을 떴다.
베즐로라는 인간과 산처럼 쌓인 열매, 그리고 약초로 덮인 상처가 보였다.
어린 신수는 상처와 열매와 베즐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눈에 경계심이 가득한 걸 눈치챈 베즐로는 몸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네가 잠들어버린 사이에 야탄 님, 그러니까 우리 대장이 주고 갔어. 그러니까 네 거야."
그제야 어린 신수는 자신 앞에 놓인 열매를 모두 먹어 치웠다.
오랜만의 달콤함에 경계심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하긴 인간이든 신수든 혼자 지내는 건 쉽지 않지."
베즐로는 팔을 뻗어 어린 신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몸짓을 섞어 말했다.
“너, 나랑 같이 갈래?”
베즐로의 몸짓에 어린 신수는 금세 의도를 알아챘다.
어린 신수는 베즐로를 따라 호수로 향했다. 하지만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끝내 어린 신수는 호수를 코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런, 고향이 눈에 밟히는 모양이네.”
앞장서서 가던 베즐로는 어린 신수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 내가 다시 만나러 올게. 그럼 넌 고향에서 외롭지 않을 거야.”
다시. 만나러. 올게.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울림이 좋았다. 어린 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어디 보자... 그래, 울라드 어때?”
“길잡이 강을 좋아했던 내 친구 녀석 이름인데, 너와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야.”
“죽은 사냥꾼의 이름은 좀 그런가?”
또다시 기분 좋은 울림이 느껴졌다. 어린 신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맘에 든다면 다행이네.”
“그럼, 울라드. 금방 다시 올게.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그날 이후로 어린 신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약속을 지킨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지어준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따라 요괴를 사냥하는 법을 익혔고, 강해졌다.
시간이 지나 이 어린 신수는 자랐고 길잡이 강의 수호신, 울라드로 불리게 되었다.
나약한 어린 신수가 수호신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하고 강한 신수가 되는 세월에도
하나는 변하지 않았다.
바로 베즐로는 울라드를 다시 만나러 온다는 거였다.
급습자 제르미오
강줄기는 부유섬 사이사이를 벼락같은 소리로 관통하며 떨어졌다.
요괴는 그 강줄기를 따라서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갔다.
요괴는 이 강줄기가 끝나는 곳, 동족의 땅으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요괴는 그 땅에 이르지 못하고 물기 가득한 진흙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망할 놈들... 망할 족속들... 망할 미물들..."
이윽고 악에 받친 괴성이 물줄기 소리를 뚫고 퍼져갔다.
그것도 잠시 요괴는 온몸의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
그럼에도 요괴는 괴성을 질렀다. 자기 안의 모든 걸 토해냈다.
압도적인 힘을 타고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을,
도망치는 재주만 있다며 무시하던 동족들에 대한 설움을,
감히 요괴인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인간들에 대한 분노까지.
괴성은 비록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어버렸지만,
요괴는 그렇게라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요괴 안에서 기억이라는 줄기는 점점 거대한 강줄기로 커져갔다.
"베즐로 님! 녀석이 도망칩니다! 쫓아야 합니다!"
"얼마 못 가 죽을 거다. 동료들부터 챙겨!"
한쪽 눈을 잃으면서도 자신의 어깨를 베어낸 그 사냥꾼.
한쪽 팔을 잃으면서도 자신의 허리를 베어낸 그 사냥꾼.
마지막으로 금빛 화살로 자신의 목을 관통한 그 사냥꾼까지.
거대한 기억의 줄기는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세차게 내리쳤다.
“달 사냥꾼... 달... 사냥꾼...”
요괴는 그 치욕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바라고 바랐다.
자신의 어깨를 베어낸 그놈의 남은 눈마저 으스러뜨리길.
자신의 허리를 베어낸 그놈의 남은 팔마저 잘라버리길.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관통한 그놈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길.
요괴는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 바람을 이루고 싶었다.
특히 그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거대한 상아를 든 달 사냥꾼을 떠올리며
요괴는 되뇌었다. 하지만 요괴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되뇜이 인간이 말하는 기도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는 것을.
땅지기 카메린
눈부신 노을이 부유하는 거대한 기계 도시, 이내의 위를 덮었다.
톱니바퀴 공방과 메인스프링의 발명가들이 피워낸 회색의 연기도
무역항에 하나둘씩 정박하는 크고 작은 비공정들도
요괴와의 싸움에서 돌아온 요격대 대원들의 지친 얼굴도
이 황혼 아래에서는 모두 공평한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광장에 서 있는 어느 여인의 갈색 머리칼만은 더욱 밝은 빛을 띄고 있었다.
손에 든 어떠한 목록을 보고 있느라 여인은 날이 저무는 것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쿡.
여인의 곁에 있던 투박한 인상을 가진 별자리 거북이 무심하게 그녀의 팔을 가볍게 찔렀다.
“바무, 왜 그래? 일정만 정리하고 놀아줄게. 조금만 기다려줘.”
톱니바퀴 공방과 메인 스트링과 함께 다음 이내 컨퍼런스의 주최는 어디에서 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고,
상공인협의회와는 올해 무역항에 정박하는 외부 비공정에게 통행료 징수 여부를 조율해야 했다.
게다가 내일은 하루 종일 요격대와 요괴 출몰 제보가 들어온 곳에 출동해야 했다.
물론 이 일은 달 사냥꾼 출신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니 약간의 자부심도 있었지만
요즘은 이상하게 요괴 출몰 제보가 많아진 탓에 어쩔 수 없는 일정이었다.
이처럼 남아있는 일정은 산더미였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나날들이었다.
여인은 여전히 시선을 떨군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버니혼 님을 먼저 찾아가면, 롤럼버 님이 화내시겠지? 그래, 톱니바퀴 공방에 먼저 가고...”
“바... 무...”
여인은 목록을 보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여인의 말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들로만 가득 찼다.
단순히 분쟁과 규칙을 정하고 조율하는 것뿐만 아닌, 이내에 살아 숨 쉬는 이들을 챙김에 있어 비롯되는 말들이었다.
누군가의 기쁨에 같이 기뻐하고, 누군가의 슬픔을 위로해 주는 것 또한 그녀의 일이었다.
달 사냥꾼 출신의 땅지기라서가 아닌 인간 카메린이라서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이 가득해서 그녀의 하루가 더 바빠진 걸지도 모른다.
쿡.
카메린의 별자리 거북, 바무가 또다시 팔을 찔렀다.
“알겠어. 바무. 이것만 마저 보고 놀아 줄게.”
콱!
성이 잔뜩 난 바무가 이젠 카메린의 팔을 물기 시작했다.
물론 다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프긴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일정 목록을 그만 바닥에 떨궜으니 말이다.
목록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상에, 다 흩어져 버렸어. 바무! 너 오늘따라 왜 그래!”
앉아서 목록을 줍던 카메린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바무를 바라보았다.
바무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짓궂게 웃었더니 몸을 돌렸다.
바무로 가려져 있던 카메린의 시야 앞에 황혼이 물들었다.
오늘따라 유별나게 짙은 노을빛이었다.
“바무. 이걸 보여주려고 그렇게 날 불렀던 거야?”
“바무!”
카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응시했다.
붉게 물든 하늘에 온몸이 집어삼켜지는 기분이었다.
바빴던 머릿속마저 일순간에 붉은 노을빛으로만 가득해졌다.
“잠깐은 괜찮겠지?”
카메린의 말에 바무는 기꺼이 자신의 등을 내주었다.
카메린은 바닥에 떨어진 목록을 집어 들고는 바무의 등에 올라탔다.
바무가 높이 날수록 중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노을이 닿는 곳이라도, 닿는 순간이라도 모두 평온하면 좋겠다. 너도 그렇지. 바무?”
바무는 대답 대신 투레질을 했다.
카메린이 잠깐이라도 쉬었으면 했는데 또 다른 이의 안녕을 바라고 있으니.
하지만 이러니까 카메린이라는 생각을 하며 바무는 그녀를 더욱더 높이 데려갔다.
찰나의 노을 지는 그 순간까지 그날의 비행은 계속되었다.
모사꾼 체셔
"야탄, 야탄. 놀자, 놀자아!"
칭얼대며 다가오는 체셔에게, 야탄은 거친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서, 체셔는 문득 궁금해졌다.
"야탄, 야탄이랑 다들, 왜 나랑 놀아주는 거야?"
체셔의 긴 털들이 꾸물거렸다.
어떤 생물에도 비유하기 어려운 그 모습은, 비단 사람에게만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달이 잠긴 호수의 신수들은 그런 체셔를 애써 외면했다.
홀로 남겨진 체셔를 데려와 돌본 건, 야탄과 달 사냥꾼들뿐이었다.
야탄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도,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체셔를 바라봤다.
"그건 우리가 체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사랑? 그게 뭐야아?"
"계속 말을 걸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 하는 감정이지."
"으음~ 어려워~"
체셔의 긴 털이 다시금 꾸물거렸다.
"체셔, 우리에게 장난을 칠 때 어떤 기분이니?"
"응! 계속 치고 싶어! 그리고 계속 놀고 싶어!"
"그건 체셔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사랑하기에, 장난을 치고 싶고, 사랑하기에, 계속 놀고 싶은 것이지."
"나, 달 사냥꾼들, 야탄 사랑해?"
"그럴 테지."
"야탄, 달 사냥꾼들, 나 사랑해?"
"그렇단다."
체셔는 그제야 알아챘다.
자신은 사랑이 고프다는 걸.
자신을 사랑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자신이 장난을 쳤던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해 줄 누군가가 필요해서임을.
드디어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기쁨에,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즐거움에 체셔는 온몸을 마구잡이로 배배 꼬았다.
기괴한 모습이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졌지만, 야탄과 달 사냥꾼들은 그저 그 모습에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나도 다들 사랑해!"
체셔의 몸이 거대해지며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상했다.
평소라면 누군가가 볼멘소리를 내고, 누군가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고, 누군가가 숨을 몰아쉬며 사람 좋게 웃어야 했다.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도 웃지 않았다.
체셔가 안고 있는 그들은 싸늘하게 식어있을 뿐이었다.
"다들, 왜, 그래? 야탄, 어디, 갔, 어?"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에, 체셔는 잔뜩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의 말투가 어눌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체셔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야탄과 달 사냥꾼들을 찾아,
언제나 놀아주는 이들을 찾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들을 찾아.
그러나 체셔가 찾은 건 무언가에 목숨을 잃은, 말 못 할 이들뿐이었다.
"설, 마, 내가 그, 랬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자상과 뭉갠 흔적.
그 모든 게 자신의 것이라는 걸.
그리고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모두를 죽였음을.
"아아, 아, 아아아."
체셔의 눈물은 초점 잃은 눈에서, 일그러진 볼에서, 그리고 차가운 시체로 떨어졌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 그것은 사랑도, 분노도 아니었다. 바깥에서부터 잠식하는 이상한 기운일 뿐이었다.
그 힘은, 체셔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장난치고 싶어, 모두와 함께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
놀고 싶어.
체셔의 장모가 움직였다.
바닥의 시체는 인형처럼 장모에 들려, 그대로 체셔의 입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체셔의 입에서 익숙한 달 사냥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꺄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이 나왔지만, 눈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기에.
"나랑, 놀자아."
파종하는 머크
머크가 씨앗을 발견한 건,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수영하는 도중, 꼬리에 무언가 이물감이 들어 확인했을 뿐이었다.
꼬리에는 투박하게 생긴 씨앗들이 목숨을 구걸하기라도 하듯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씨앗, 필요 없다."
그가 살고 있는 곳에 널리고 널린 게 꽃과 풀 같은 식물들이었다.
흔해 빠진 물건이 어떻게 귀한 물건이 될 수 있는가.
달이 잠긴 호수에 사는 그 어떤 인간도 이것을 보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름답고 귀해 보이는 물건을 모으는 머크에게 그것은 가치 없는 물건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버리기 위해 다시 물에 던져놓으면, 또 머크의 꼬리에 걸려 귀찮아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머크는 씨앗을 방치했다.
머크의 보물을 숨겨두는 은밀한 곳 옆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느 때와 같이 머크는 귀해 보이는 물건을 숨겨두기 위해 다시 이곳을 찾아왔다.
그러나 머크의 눈길을 끈 것은 보물이 아니었다.
투박한 껍질 사이로 튀어나온 연약한 새싹.
아무래도 따스한 햇빛과 머크가 물과 뭍을 오가며 흘린 물들이, 씨앗의 성장을 도운 듯싶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머크는 무시할까 싶었지만, 그대로 씨앗들을 땅에 심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변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도 머크는 이곳을 올 때마다 씨앗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눈 흘김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관찰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방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돌봄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무관심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애정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머크는, 자라나는 새싹에, 식물에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더불어 머크의 변덕 또한 더욱 커져만 갔다.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꽃봉오리를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식물들은 화사하게 만개했다.
머크는 우연히도, 그 모습을 직접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올망졸망 봉오리 져 있던 꽃들이, 햇빛을 받아 만개하는 그 모습.
투박한 땅을 가득 메우며 피어나는 수어 송이의 알록달록한 꽃잎들.
작고 하찮게 여겨지던 것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그 과정.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머크는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엄청나다."
머크는 꽃밭 가까이 가 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꽃잎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머크는 깨달았다.
작디작았던 변덕이 만개하여 자신의 가슴을 가득 채웠음을.
그 어떤 보물보다 눈앞의 꽃이 가장 값져 보임을.
자신은 평생 이 광경을 잊지 못할 것임을.
'식물을 가꾸는 건,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군.'
들바람이 일었다.
꽃잎들이 바람결에 일렁였다.
마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기라도 하듯이.
벌목꾼 그레일로
혹시, 그거 알아?
그레일로가 지나가는 곳은 곧 길이 된다는 거.
무슨 뜻이냐면, 그레일로가 지나가는 곳의 나무들은 모두 부서진다는 거지.
그 어떤 나무도 그레일로에게 걸리면 남아날 수 없어.
그래서 달이 잠긴 호수에는 항상 길이 나 있는 거야.
그레일로가 호수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거든.
우리가 호수 어디든 갈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정말 '벌목꾼'이란 이름에 걸맞은 녀석이지 않아?
근데 한 가지, 네가 더 알아둬야 할 게 있어.
그레일로는 마구잡이로 부수는 게 아냐.
그레일로가 부수는 건, 부숴야만 하는 것들뿐이야.
무슨 말이냐고?
그레일로는 평범한 것들을 부수지 않아.
숲에 종종 너무 거대해져 풀들의 성장을 막는 녀석이나 이미 죽은 녀석들 있잖아?
그래, 그레일로가 그런 녀석들만 부수는 거야.
그런 녀석들이 오래 남아있으면 달이 잠긴 호수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차리냐고?
그레일로는 굉장히 똑똑한 신수거든.
외형과 냄새, 그리고 나무를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
그렇게 녀석은 모든 정보를 종합하고, 판단을 해.
그리고 부수지.
겸사겸사 우리를 위해 길도 내고 말이야.
응? 이 이야기를 왜 하냐고?
...그냥, 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라도.
부디 그레일로를 미워하지 말아 줘.
녀석이 어떤 모습이 되어도, 너만은 말이야.
종말의 숭배자
종말의 추적자 녹스
유랑 요수 대응팀 사고 현장 보고서.
쌓여있는 먼지나 미스트 연료통 등의 상태를 보아 할 때 동일한 일시에 마을에서 사라졌다고 추측됨.
이내에 등록되어 있는 비공정이 모두 마을 항구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 등록되지 않은 해적선의 항해가 기록된 적 있는지 확인 필요.
마을의 각 거주지를 조사한 결과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지 않고 최근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음.
전투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아 할 때 현장 조사관은 요수의 소행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
특이 사항 : 마을 광장을 조사하던 몇몇 인원이 원인 불명의 어지러움과 구토증세를 호소함.
광장 근처에서 보랏빛 흔적과 함께 붕대 조각이 발견됨.
요격대에서 요청한 조사 협조 항목 중 천해천 출신의 실종자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는 정보에 따라
해당 붕대 조각들을 조사 증거품으로 본부에 함께 첨부해서 배송 예정.
이하 보고 외 분석관 개인 기록.
한 사람은 온몸에 붕대를 감았다고 하고, 한 사람은 어이님 말고는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고...
뭘 어떻게 찾으라는 겁니까 이거?
주요 인물
굳건한 아스킨
혈광촌으로 들어가는 선착장을 지키고 있는 꼬마.
원래 혈광촌은 일평생을 피 흘리는 철광에서 일해온 광부들이 아래 세대에게 노하우를 전수해 주며 대를 이어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스킨의 윗세대 즈음부터 점점 철광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스킨은 그런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의 생업을 잇겠다며 어른들을 따라다녔다.
어른들도 그런 아스킨이 대견했는지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에게 다양한 기술을 알려주었다.
아직 어린아이라 철광 깊은 곳까지는 갈 수 없고, 채광 실력도 어딘가 미숙하지만, 좋은 원석을 찾아내는 눈은 어른들도 인정해 주는 편이다.
어느 날 요괴들이 나타나자 마을의 어른들은 요괴를 막기 위해 철광 깊은 곳까지 들어갔고, 아스킨은 어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혈광촌을 지키고 있다.
요격대 테아스
중천 요격대 소속의 비행사.
거침없이 비공정을 모는 요격대의 비행사 중에서도 특히 빠른 속도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테아스의 성격을 대변하듯 그의 비공정 역시 빠른 속도의 운행에 적합한 소형 쾌속정이다.
평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초면인 사람에게도 낯선 기색 없이 친구를 대하듯 허물없이 행동한다.
늘 활발한 모습이니 취미 또한 활동적인 것을 즐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의외로 테아스는 남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고대의 유적을 탐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어릴 때부터 테아스가 고대의 역사와 신이라는 존재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역사에 대한 지식이 아주 깊다고 한다.
달 사냥꾼 베즐로
요괴를 사냥하는 중천의 달 사냥꾼.
요괴 사냥이라면 능통하기로 유명한 달 사냥꾼 사이에서도 가장 숙련된 사냥 실력을 가진 자로 중천에서 유명하다.
길잡이 야탄을 도와 달 사냥꾼들을 이끌고 있으며, 달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하고 있다.
요괴를 상대할 때는 누구보다 빠르고 냉철하지만, 평소에는 부드럽고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사람이든 신수든 모두와 금방 친해진다.
그 덕분에 주변에 크고 작은 신수들이 끊이지 않는데, 특히 길잡이 강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신수 울라드가 그를 아주 잘 따른다고 전해진다.
괴짜 버니혼
메인스프링을 대표하는 발명가
버니혼은 메인스프링 내에서도 알아주는 괴짜로,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두려워한다.
반드시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구현해 내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괴짜 중의 괴짜로, 그의 발명 중 8할은 모두 폭발로써 막을 내린다.
이로 인해 그가 부숴버린 건물만도 이미 수십 채에 달하지만, 이로 인해 생긴 손해를 모두 메꾸고도 발명을 이어 나갈 만큼 뛰어난 성취를 보이기도 한다.
유쾌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살갑고 친근하게 구는 탓에, 라이벌로 여겨지는 톱니바퀴 공방의 롤럼버에게도 이해관계나 편견 없이 대하고 있다.
다만 예절과 품위를 중요시하는 톱니바퀴 공방의 롤럼버는 그를 매우 귀찮아하며 싫어한다.
"일단 만들고 터지면 어쩔 수 없지." 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설계자 롤럼버
톱니바퀴 공방을 대표하는 발명가
톱니바퀴 공방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가 제공하는 설계도는 구현 자체가 어렵지만, 구현만 된다면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러한 능력에도 구현 자체에 대한 롤럼버의 손재주는 다소 평범해서, 설계도를 만들고도 정작 실체화하지 못하는 것에 큰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예절과 품위, 역할과 규칙, 계획과 순서를 지켜야만 하는 민감한 성격과 합쳐져,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면 굉장히 예민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롤럼버의 차갑고 개인주의적인 면모에 환멸을 느끼지만, 한껏 화를 낸 후에 자신이 심했다는 건 아는지 이따금 미안함을 표시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메인스프링의 버니혼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티를 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존재만으로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설계도를 수정한다고? 그건 애당초 완성된 게 아니야!" 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