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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7 Act 17. 혼돈의 오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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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검은 계시
혼돈이 내려앉은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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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검은 계시
일러스트
죽음에서 일어난 자
펠 로스 제국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가장 비참하게 져버린 별 중 하나.
카잔과 함께 황제의 측근으로 제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자.
그리고 반역이라는 치욕스러운 죄명으로 황실과 제국에게 외면받은 자.
한 때는 펠 로스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반려로 두고 있던 사내
제국의 나침반이자 인도자라 불리던 지혜롭고 총명하던 존재.
가장 밝고 화려하던 별은 분노와 원한으로 타오르며 펠 로스 제국에 내려앉았으니
그것은 말 그대로 재앙이라.
사랑하는 여인의 가문이자 펠 로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던 황금의 도시 '엘레리논'
가장 밝게 빛나던 도시는 성전의 불꽃으로 100여 년간 전쟁의 겁화가 꺼질 날이 없었으니.
황금으로 빛나던 그곳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혼돈의 도시가 되어버렸구나.
크고 화려한 불꽃일수록 칠흑의 재를 남기는 법.
제국의 가장 크게 빛나던 별, 제국의 검은 재가 되었으니.
펠 로스 제국의 가장 큰 아픔이자 치부인 검은 성전.
그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한때는 영웅이자, 이제는 혼돈이 되어버린 자의 이야기를 전하며
성전의 아픔을 노래로 담아 후세에 길이길이 남기리라.
- 과거 '검은 성전'에서 살아남은 어느 음유시인의 노래
혼돈의 오즈마
혼돈의 왕좌 BGM
어둠 속 씨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세상에 분노를 표하는 아우성이자 원한에 사무친 설움이다.
혼돈이 세상을 좀먹는다 생각하는가.
혼돈이 부정한 것을 몰고 와 선량한 이를 썩어 들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혔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내 목소리였다 생각한다면 그리 생각하라.
머릿속 부정한 것들을 속삭이는 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게, 진정 혼돈의 짓이라 생각한다면 그리 받아들여라.
그것은 너희의 안에 똬리 틀고 있는 그릇된 진실의 뱀이며,
부정하고 싶은 내면의 메아리는 너희가 내뱉은 단말마일지니.
가리고 싶은 진실과 부정하고 싶은 목소리가 들려 괴롭다면
그래, 편하게 내 짓이라 말해도 좋다.
그것으로 세상이 까발려지고 너희의 아둔함이 드러난다면,
내가 몸소 곪은 상처 속의 그것을 꺼내어 너희의 앞에 보여주겠다.
나는 그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세상의 나침반이며 먼저 쏘아진 화살일 뿐이니,
화살 하나를 겨우 받아친다고 뒤이어 쏟아질 화살의 우레를 모두 막아내진 못할 것이다.
내 시위를 당긴 것은 원한이었으나 내가 가르고 나가는 것은 뒤집힌 세상의 하늘이니.
옭아맨 사슬이여, 혼돈은 이미 사슬로 묶어두기엔 너무 커져 버렸고
앞을 가리는 빛이여, 내 두 눈은 이미 빛 속에 어둠을 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보아라.
내가 나서지 않아도 혼돈의 시간은 도래했고,
기어코 저들은 내 앞에 당도했음을...
이는 예견되었던 수순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음이다.
그 진실대로라면 이 껍질은 부스러지겠지만, 껍질을 부수고 돋아난 혼돈은 영원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명계에 기다리고 있을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것이 내가 정한 나와 세상의 종막이니...
소멸의 신 카잔
생을 뒤로한 자들이 찾는 세계에는 붉은 달만이 나를 비추고
신념과 맹세를 위해 내달린 내 과업은 업보가 되어 나를 짓누르는구나.
아홉 귀신의 시련이 족쇄가 되어 내 발목을 붙잡지만...
하지만 말이네.
그 시련을 뒤로하고서라도 자네를 붙잡아야만 했네.
시련의 시간이 늦춰질수록 내 그림자에 드리운 죄의 무게는 무거워졌지만,
증오로 모든 걸 내버린 친우의 말로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으니까.
제국을 향한 증오는 나 또한 끊어진 힘줄이 들끓을 만큼
멈춰버린 심장이 울음을 토할 만큼 형형하게 남아있지만.
사랑하는 이와 그 이를 바라볼 수 있던 두 눈을 잃은 자네의 심정만은 못할 것이네.
차라리 내가 모든 걸 짊어지고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잃을 것 없는 내가 모든 걸 짊어지고 가면 편했을 것을...
그녀의 속삭임에 흔들리는 자네를 보며, 모든 것이 내 죄인 것만 같았네.
텅 빈 영혼만 남은 자네가 그 영혼마저 내던지려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
차라리 내 영혼을 태워서라도 자네만큼은 온전히 남겨두고 싶었는데...
이미 생의 모든 과업을 이고 이곳에 불려진 나는 자네의 발목을 붙잡는 것밖에 할 수 없었네.
그리고 그 날이 오고 말았지.
세상에 몇 번이고 경고했던, 오지 않기를 바랐던 그 순간이.
명계에서 붉은 달이 사라지던 날, 나 또한 달과 함께 이곳에 닿았고,
무뎌지고 흐릿해진 줄로만 알았던 제국에 대한 분노가 생살에 각인된 것처럼 타올랐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자네는 그곳에서 지켜보게나.
자네의 업보를 내가 다 짊어질 테니.
그날의 기억처럼 붉게 흐르는 하늘 아래에서
그날의 후회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내 손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겠네.
그리고 그 뒤에 모든 죄를 내가 지고 가겠네.
명계의 부름이 나를 찾기 전까지..
검은 공포의 아스타로스
오소서 혼돈이시여.
당신의 뜻대로 성자의 진실을 빛의 노예들에게 알려주었나이다.
그들의 상실과 분열을 똑똑히 지켜보았고, 치부를 덮으려는 기만 역시 지켜보았나이다.
그로 인해 고뇌하고, 추락하고, 타락한 자들을 이끌었나이다.
오소서 혼돈이시여.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교단을 준비했나이다.
외진 골목에서 이미 죽어있던 소녀에게 삶을 부여했고,
소녀는 당신의 계시를 설파하는 계시자가 되었나이다.
성자의 모순을 깨닫고 고뇌에 빠진 빛의 노예는 결국 빛을 등졌고,
파멸의 선택을 받아 끝내 사명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했나이다.
절망 속에 살던 소년은 자그마한 동기를 주는 것만으로 검게 물들었고,
오래지 않아 절망의 선택을 받아 누구보다 충직한 개가 되었나이다.
스스로를 구원자라 여기는 오만한 빛의 노예는 스스로 타락의 길로 들어섰고,
끝없는 욕망으로 결국 파멸을 거머쥐었나이다.
분열된 빛의 노예들에게 가족을 잃고 추락한 자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의 날개는 수많은 빛의 노예를 도륙했나이다.
오소서 혼돈이시여.
당신이 뜻한 모든 것을 준비했나이다.
세상을 다시 혼돈으로 물들일 준비가 되었나이다.
오소서 혼돈이시여.
드러난 파멸의 베리아스
대기에 가득찬 혼돈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베리아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쾌한 기분과 함께 전신에 흘러넘치는 힘은 몇백 년 전의 과거로 그를 이끌었다.
파멸의 평원이라고 불리던 이곳에서 항상 선봉에서 위장자 부대를 이끌며
적들의 군대를 유린하던 기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했다.
혼란한 전장에서 앞길을 막아서던 건방진 프리스트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들 중 대부분은 대검으로 그 오만한 표정을 뭉개줄 수 있었지만...
결국 그토록 유리했던 전쟁의 결말은 충격적인 패배였다.
"...미카엘라."
으르렁 거리듯이 내뱉은 목소리에 살벌한 적의와 두려움이 동시에 묻어나왔다.
위장자들에게 치명적인 신성력을 사용하며 프리스트들을 결집시키던 성안의 소년.
십자가 하나가 검은 대지의 한구석에 남아 위장자 군단의 진군을 가로막고 있긴 하지만,
미카엘라는 더 이상 이 전장에 없다.
베리아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글래든 평원의 중심부였다.
비록 그가 부활했을 때, 마땅히 마중나와 있어야할 순혈자는 행방이 묘연했지만
수많은 전투를 함께했던 낡은 전차 한 대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흐흐... 다시 한번 같이 날뛰어보자꾸나."
혼돈의 재림은 멀지 않았고 이번에야말로 더 이상의 패배는 없을 것이다.
곧 벌어질 살육에서 흘러나온 피로 목을 축일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과거의 힘을 되찾은 파멸의 입가에 기대감에 젖은 미소가 걸렸다.
다가온 절망의 티아매트
지옥마의 투레질 소리가 검은 대지 위에 울려 퍼졌다.
절망의 기사가 올라탄 말은 발굽 소리도 내지 않고 그림자로 덮인 땅 위를 가로질렀다.
수백 년간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돌아온 검은 대지는 사방에 혼돈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
다가올 전투 직전의 고요를 느낀 티아매트가 지옥마를 멈춰 세웠다.
적의로 들끓는 가슴은 당장이라도 적에게 달려들어 피를 볼 것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차가운 이성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미 한번 창을 부딪쳐 본 적들의 실력은 상당했고
강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다가오는 적들의 기운을 살폈다.
예상대로 역겨운 신성력 속에는 혼돈의 기운이 뒤섞인 자들이 끼어있었다.
"트로카."
티아매트의 부름에 어느새 나타난 묘령의 여인이 대답했다.
"예, 절망이시여."
"적들 사이에 혼돈의 힘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있는지 살펴라.
나약한 정신을 헤집는 네 능력이라면 그들이 억누르고 있는 혼돈의 목소리를 일깨우기도 쉬울 터."
고개를 숙여보인 트로카가 사라지자,
티아매트는 지옥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그 기운을 회수해 망토의 형태로 몸에 둘렀다.
이번 전투에서 그는 혼돈의 재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너라. 이번에야말로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 속에 빠트려주마."
티아매트가 무의식 중에 방출한 기운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그림자의 어둠을 한층 더 짙어지게 만들었다.
같은 적에게 겪는 패배는 한 번으로 족했다.
혼돈을 탐하는 반야
"시끄럽군요."
나지막이 읊조리며 사흉수의 기운을 끌어올리자,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한 채 주변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돈의 왕좌 바로 옆에 위치한 거울의 정원.
'아르미스'라고 불리는 이곳은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거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야는 발걸음을 늦추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순혈자의 힘을 흡수한 뒤 변한, 그의 모습 위로 혼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나는 혼돈의 하수인이 아닌 극락정토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반야는 내뱉은 말을 뒷받침하듯 꽉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파문도, 세상의 손가락질도 견뎌온 그였다.
긴 인고의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넣은 기회를 그는 철저히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이용할 생각이었다.
흡수한 파멸과 절망의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즈마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그의 자아를 온전히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의지를 잃는다면 결국 혼돈의 수족이 되버리겠지만...
"불필요한 것은 덜어내고 필요한 것을 다시 담으면 그만."
반야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냈다.
힘들다해서 여기까지 와서 이룬 것들을 포기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슬슬 종막이 보이는 이 성전의 끝에서 그는 지금까지와는 한차원 다른 존재가 될 예정이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반드시..."
자신의 신조를 되새기며 그는 다시 혼돈의 내면을 더듬어 나갔다.
혼돈의 계시자 콜링 제이드
한 여성이 탑을 오르고 있었다.
한때 엘레리논의 눈이자, 지식의 상징이라 불리었던 탑.
탑의 정상에 올라서자 엘레리논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아... 당신의 영광스러운 땅을 밟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감상은 잠시뿐이었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탑이 바르르 떨려왔다.
하늘에, 땅에, 눈앞의 모든 것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세상을 뒤덮을듯한 거대한 지네가 탑을 휘감으며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네는 거대한 머리를 여성의 눈앞에 드러냈다.
치르르르-
지네의 비늘이 부딪히며 소름 돋는 소리를 냈다.
누구나 그 모습과 크기에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갈 법도 하건만
여성은 황홀하다는 듯 지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여성을 가늠하던 지네는 조용히 거대한 머리를 여성의 앞으로 가져갔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여성으로서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여성은 지네를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최초의 위장자, 엠페르누아...!
혼돈이시여, 당신의 계시를 받듭니다."
충만하게 깃든 혼돈의 기운이 그녀를 뒤덮었다.
한발 내디딜 때마다 몸을 뒤덮었던 두꺼운 덩어리들이 허물처럼 떨어져 나갔다.
한걸음, 또 한걸음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느꼈고,
마침내 완연한 우화를 끝마친 여성은 여유롭게 지네의 머리에 올라섰다.
여성을 태운 지네는 탑 꼭대기까지 몸을 휘감았다.
혼돈에 물든 아름다운 광경이 다시금 눈앞에 들어왔다.
"혼돈의 계시자로서, 세상 모든 이가 당신의 계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네의 포효가 검은 대지에 울려 퍼졌다.
쫓아오는 드라우그&장난스런 프리그
저것 좀 봐, 드라우그!
네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들이 이렇게나 많아!
워워~ 잠깐마안!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인간들인데,
배가 고프다고 그냥 먹어치웠다간 또 한참을 후회해야 할거야.
그럼 어떡하냐고? 걱정하지마!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너무 배고파 참기 힘들 때 먹이로 줄게.
그렇지? 너도 같은 생각이지?
랄랄라~ 그럼 무슨 놀이부터 해볼까?
거기 너! 공놀이 좋아해? 아니면 신나는 술래잡기?
팔다리가 터져나가는 방울방울 놀이는 어때?
후후,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지을 것 없어.
간식 타임은 제일 마지막 순서니까!
그렇지만 네 뒤에 있는
그 부상 당한 동료에게 드라우그가 달려들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심심하지 않게 잘 놀아줘야할 거야?
혼돈을 따르는 데스페로
한껏 뜨거워진 악마의 피가 몸 속의 세포들을 달궜다.
혼돈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한 데스페로는 광소를 터트리며
필리스 대로의 바닥에 숨이 끊어진 적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검은 대지에 퍼져있는 혼돈의 기운을 깊이 들이마실수록
이마의 뿔은 더 단단해지고 전신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검은 대지에 감히 발을 들인 불손한 녀석들을 전부 참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였지만, 데스페로는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를 망각하지는 않았다.
혼돈의 재림을 위해서는 하찮은 적들을 찢어발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우선은 길고 긴 잠에 빠져든 소멸의 신을 깨워야했다.
강제로 깨어난 소멸의 힘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을 테고,
그가 몸을 빼내는 사이 자연스레 모험가들을 덮칠 것이다.
헐거워진 봉인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가해지는 혼돈의 힘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고
마침내 아라드에는 혼돈이 다시 강림하게 되겠지.
그리고 다음은...
데스페로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다음? 다음은 없었다.
암흑 3기사의 힘을 담을 그릇으로 검은 교단에 몸을 바친 순간부터
그가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의 온전한 멸망이었다.
"혼돈의 종이 당신의 의지를 따르나이다."
그는 더 이상 절망의 기사에게 속한 종자(從者)가 아니었다.
세상의 파멸을 진심으로 믿고, 이를 원하는 혼돈을 따르는 자.
데스페로(Despero).
장군 카렐린
옷깃을 파고드는 설산의 추위는 혹독했다.
쉴 새 없이 시야를 가리며 내리는 눈보라 때문에,
언덕 아래로 떨어트린 목발은 새하얀 설원 속으로 가라앉은지 오래였다.
"눈보라 소리가 꼭 사람들의 환호성 같지 않소이까?
계속 듣다보니 대장군과 함께 개선 행진의 선두에 섰을 때가 떠오릅니다."
설산의 정상.
가까워진 태양조차 좀처럼 녹이지 못하는 만년설 위에서
두 다리의 힘줄이 뽑힌 남자가 누군가의 시체 앞에 주저 앉아 있었다.
그가 끌어안고 있는 시체 또한 양팔의 힘줄이 모두 뽑힌 모습이었다.
"그 때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항상 선봉을 자처했고 전투 후에 마시는 한잔 술에 모든 아픔과 근심이 날아갔지요."
잠시 말을 멈춘 남자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울려퍼졌다.
창백해진 얼굴과는 달리 아직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좋았던 기억을 반추하는지, 남자의 눈동자에 잠시 생기가 돌아왔다.
"그렇게 충성을 바쳤건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잃은 것은 가족들과 두 다리의 힘줄이고 돌아온 것은 대장군의 싸늘한 주검뿐입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대장군의 모습을 이렇게 눈에 담을 수 있으니 다행이긴 하오만... 크흐흐..."
격양된 감정으로 내뱉은 호흡과 눈물은 설산의 추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남자의 수염은 점점 푸른 빛을 띠어갔다. 그는 전보다 숨쉬는 게 답답해진 것을 느꼈다.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한 남자의 얼굴에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후우....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저승이라는 곳이 있어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힘겹게 이어지던 남자의 호흡이 마침내 끊어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눈보라 속에서 그가 하려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그곳에서도 대장군을 쫓아 전장의 선봉에 서겠소이다.
부관 레오니트
단검을 든 손이 떨려왔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전우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과 오랜 칩거 생활은
전장을 누비던 젊은 부관의 육체를 단검 하나 제대로 집지 못할 정도로 병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조용히 단검의 날을 바라보았다.
카잔의 죽음 이후, 악몽처럼 이어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의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기침처럼 터져나오는 핏물을 도로 삼키며, 그는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카렐린 장군... 그리고 대장군님."
작위를 반납하고 폐인이 된 채 총기를 잃어가던 그를 일깨운 것은 대장군 카잔의 추방 소식이었다.
양팔의 힘줄이 끊기고 추방자의 산맥으로 쫓겨난 죄인이 살아돌아온 사례는 없었기에,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카잔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여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못난 부관을 끝까지 용서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황제의 계략에 속아 움직였다고 해도 저는 배신자입니다."
무릎 꿇은 레오니트 앞에는 부관직에 오르던 날 카잔이 선물해준 검과 카렐린이 선물해준 방패,
그리고 그가 항상 전장에 들고 나서던 마법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모두 세 사람의 결속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그가 늘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이었다.
"비록... 육신은 이곳 수도에 유폐되어 있지만, 마음만은 그대들을 따라나서려 합니다.
부디 가여운 제 영혼만이라도 내치지말고 거두어주시길."
속죄하듯 앞으로 엎어진 그의 육신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바닥을 타고 흐른 선혈이 검과 방패, 마법서를 차례대로 적시고 있었다.
토해낸 피로 범벅이 된 레오니트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
어느새 열린 명계의 문 틈으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절개하는 스칼펠
스칼펠은 특별했다.
혼돈의 기운을 그리 많이 품지 못했을 때부터
그는 날붙이에 찔리거나 베여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몸에 돋아난 네 개의 팔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적들을 찢어발길 수 있게 만들었다.
전장에서 정신 없이 싸우다보면
그의 몸엔 어느새 적들이 찔러넣은 날붙이들이 수도 없이 박혀있기도 했는데,
이는 그대로 스칼펠의 손으로 들어가 그의 무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암흑 3기사의 강력한 힘을 두려워했지만,
정작 전장에서 그들 못지 않게 적들을 도륙한 것은 스칼펠의 칼날이었다.
베어넘긴 적들의 영혼이 수백 단위를 넘어가자, 주위를 맴돌며 그를 귀찮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그는 원혼들을 가둬놓을 관을 짊어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황폐해진 그의 내면은 인간일 적의 기억을 희미해지게 만들었지만,
스칼펠은 자신의 본성이 그리 좋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관을 등에 지고
달려드는 적의 참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상대를 베어넘길 때 느껴지는 감각은 언제나 그에게 커다란 희열을 선사했으므로...
침투자 트로카
쉬이~ 쉬이이~
깨어나지 말아라. 이곳은 달콤한 꿈 속.
하루 종일 맞부딪히는 병장기 소리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위장자도 사실은 모두 없던 일.
쉬이~ 쉬이이~
위장자로 변해 맞아죽은 신랑도
나를 기둥에 묶어버리고 도망간 마을 사람들도
꿈에서 깨어나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이야기일뿐.
쉬이~ 쉬이이~
이미 벌어진 잔인한 일들은 전부 꿈 속에 묻어두고
평소에 생각했던 온갖 악행들도 모두 이곳에 풀어두고 가거라.
혼돈이 한차례 세상을 휩쓸고 지나가면
슬펐던 꿈에서 깨어나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면 그뿐.
쉬이~ 쉬이이~
그러니 지금은 깨어나지 말아라. 이곳은 달콤한 꿈 속.
모두가 함께 이 꿈의 끝을 보기 전까지는.
- 위장자가 발생한 병영에서 밤새 들려오던 노랫소리
혼돈에 잠식된 K
검은 대지에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치열한 싸움을 알려주는 듯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한 구의 유해에 다가갔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원래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분명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인가?
그 오랜 시간 분노에 찬 나의 신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작은 의심이 시작되는 순간 그 의심은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의 말대로 정녕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가?
나의 신이라 여긴 이의 말을 누르고 새로운 혼란을 준 자는 정말 내가 답을 알고 있다 여기는 것인가?
그날 이후, 가슴 한편에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의 틈을 비집고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여태까지 한 일은...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낸 것뿐이었던가?
'무엇을 의심하는 것이지?'
머릿속에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저항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느끼며 무릎 꿇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힘은 절대적인 명령과 같았고,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
'기만으로 가득 찬 것들을 끌어내릴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건만, 그 작은 기만에 흔들리는구나.'
"혼돈이시여. 저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일들은..."
발아래의 검은 대지로부터 그분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감싸오는 혼돈의 힘이 나를 잠식해오기 시작했다.
'의심을 거두고 그저 지켜라.'
"무엇을 말입니까?"
'너의 소중한 것을.'
"어떻게 말입니까?"
'소중한 것을 잃게 한 자들을 모조리 파멸시킴으로써.'
눈앞에 잠깐 보였다 느꼈던 빛은 점점 차오르는 혼돈의 기운에 잠식되어 사라졌다.
광기의 어둠 제트
어둠 속에 늘어진 자여.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동료와 함께하는 협동심?
몇 수를 내다보는 혜안?
왜 패배했는지 분석하는 치밀함?
아니지.
그건 너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야.
그딴 건 평범한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어둠 속에 늘어진 자여.
특별한 너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눈앞의 적들을 파멸시킬 강력한 힘.
그리고 더 지독한...
"과, 광기..."
그래그래. 잘 알고 있구나.
이 검은 대지에 늘어진 나의 힘이 너를 더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느냐?
네가 가진 광기야말로 혼돈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되어줄 것이니.
온전히 받아들 거라.
"크흐, 으흐흐흐... 크하하핫!!"
그래. 그렇게.
빛에 바랬던 너의 어둠은 이제야 혼돈의 광기에 물들게 될 터이니...
마음껏 미쳐 날뛰거라.
광기에 가득 찬 어둠이여.
혼돈의 사신 벤타
검은 대지에 들어섰을 때,
벤타는 오즈마의 시선이 온전히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꼈다.
"...!?"
대지에 가득찬 혼돈의 기운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맹혈자의 피로 육신을 불태운 이후 처음으로 그는 숨을 곳이 없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토록 아늑하게 느껴지던 길 위의 그림자조차 그의 대피처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변화는 혼란스러운 상념들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찾아왔다.
그의 내면을 바닥까지 들추어내던 오즈마의 시선이 거두어지자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이 혼돈의 기운이 그의 가슴팍을 구심점 삼아 모여들었다.
잠시 당황하던 벤타는 곧 그 의도를 깨닫고 기쁜듯 소리쳤다.
"오소서, 혼돈이시여!
미천한 종이 당신의 눈이 되겠나이다!"
가슴팍에 모여든 혼돈의 기운은 서서히 눈동자를 만들었다.
영겁 같던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눈동자가 뜨인 순간,
벤타는 검은 대지의 모든 곳을 볼 수 있었고
오즈마는 그를 통해 감겨있던 눈을 뜰 수 있었다.
너는 더 이상 미천한 존재가 아니다.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들었을 때,
벤타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음을 깨달았다.
적들을 죽음이라는 안식처로 인도하고
아군에게는 위대한 그분의 뜻을 전하는 혼돈의 사신으로서.
혼돈이 내려앉은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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