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은 가만히 양피지를 바라보았다.
용족들이 즐비한 바칼의 궁에선 전자기기조차 함부로 쓸 수 없었기에,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양피지엔 얼기설기 엉킨 검붉은 핏자국이 눌어붙어 있었고이는 양피지가 여인에게 전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여인은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기도.알고 있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줄 신이 존재했다면 저 포악한 용에게 이 땅이 무참히 짓밟히지도 않았겠지.그럼에도 여인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그로 인해 병사들이 두려움을 떨쳐내고 싸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제든, 무당이든 되어줄 수 있었다.추상적인 신 따위가 언젠가 자신의 바람을 들어줄 거라 믿어서가 아니었다.언제나 자신이 기도를 올려온, 자신의 바람을 들어줄 신은 눈앞의..."이리네 님, 항상 누구에게 기도하시는 겁니까?"기도를 넋 놓고 바라보던 병사의 물음에 이리네는 눈을 떴다.이리네는 병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제 소망을, 모두의 염원을 들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입니다."병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리네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그보다, 네 용인이 바칼의 궁으로 향했다는군요. 마침내 로자가 말한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플로와 주베닐에게 작전을 시작할 때가 왔다고 전해주세요."짧게 고개를 숙인 병사는 이내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이리네는 낮게 읊조렸다."부디 이번 전투에서도... 나의 신들께서 무사히 생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