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나를 아름답다 칭송하는 어리석은 아이야.
나의 곁을 지키며 너의 마음이 진실함을 증명하여라.
이제 나의 향기가 너를 감싸안을 것이니.
네 진실함이 변치만 않는다면, 너의 힘이 되어주리라.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모든 것이 시작된 이 곳으로 돌아왔구나.
긴 시간 내가 없는 공백 속에선 모든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변하지 않는 것도 분명 존재는 하더구나.
바로 너희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다.
너희의 눈에는 내가 꽃 한 송이에 미쳐 인간을 버린 악신으로 보이더냐?
이미 그것부터 너희의 오판이다.
내가 바란 것은 범인을 잡는 것도, 나르시스를 되찾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믿음에 보답하지 못했음을 내게 고하는 신실한 이 하나만을 바랐을 뿐.
설령 영혼을 잃은 슬픔에 가슴이 미어지게 고통스러워도, 너희와 함께 버텨냈을 것을.
잠시 쓸모 없는 감상에 빠졌구나.
이제 그러한 가정이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모든 것은 이미 천 년 전에 끝났거늘


바스라진 풍요 : 한 때는 나의 권능 아래 풍요를 누리던 이들도 있었지.
불신이 낳은 집착 : 나 또한 그들을 꽤나 아꼈지만, 이 발칙한 것들은 나의 것에 손을 대더군.
분노가 불러온 어둠 : 하여, 나의 것을 찾고자, 믿음을 저버린 너희에게 저주를 내렸다.
증오를 품은 저주 : 너희의 거짓된 믿음이 불러온 저주이거늘, 어찌 나를 원망하느냐?
허울 뿐인 우아함 : 자 보아라, 나는 여전히 건재하며,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노라.

눈부시게 찬란했던 모든 것의 변화가 시작되었을 때의 기록.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외면의 치장이 아닌 내면까지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만물에는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미의 여신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였으며, 누구보다 만물의 아름다움을 아끼는 신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안개 속에서 피어난 조화라는 가치는 모든 이의 평등을 주장했다.
그 누구에게도 고저가 없는 조화의 기준 아래, 아름다움의 가치는 점차 과거의 위상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던 미의 여신은 여전히 인간을 믿었으며,
그들을 굽어살폈으니 그녀의 권세는 이전보다는 약해졌을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 적어도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잃어버린 영혼 : 대답해 보거라, 어째서 나의 영혼을 지키지도 못한 너희의 저주를 거두어야 하느냐.
무너져버린 고결한 자태 : 내가 너희에게 많은 것을 바랐느냐? 아니, 내가 너희에게 바란 것은 오직 하나였다.
사라진 존재의 이유 : 내가 먼저 보여준 믿음. 정확히 그에 응당하는 믿음 만을 너희가 보이길 바랐다.
원망조차 사라진 시선 : 나를 섬기겠다 하던 너희는, 섬기는 신의 영혼이 사라지던 때에 대체 무엇을 했느냐?
무정한 여신의 우아함 : 이제야 알았느냐? 이것이 바로 너희가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르시스"
아라드의 미의 여신 베누스가 가장 아꼈다는 인간의 이름.
그보다 먼 옛날, 선계의 미의 여신 베누스가 가장 아꼈다는 한 송이 수선화의 이름.
단지 순백의 꽃잎을 가졌을 뿐인 한 송이의 수선화에 불과했다.
허나 수수한 한 송이의 수선화는 미의 여신에겐 모든 것이었다.
인간을 향해 신이 먼저 꺼내 보인 믿음.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자애로움.
삭월의 짙은 어둠에도 물들지 않는 순백의 빛.
나르시스는 이 모든 것의 증표였으며 베누스의 영혼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권세가 이어지는 모든 시간이 나르시스와 함께이길 소망했다.
그러나 맹목적인 믿음은 잘못된 것임을 말하듯 인간에게 꺼내 보인 믿음은 무참히 짓밟혔고,
이루지 못한 여신의 소망은 처음이자 마지막 욕망으로 변모하여 파멸의 시작을 알렸다.


인간을 향한 분노 : 그래, 애초에 인간을 믿은 내가 아둔한 여인이었다.
비틀어진 악신의 욕망 : 인간을 믿었기에 영혼을 잃었으니, 내가 인간을 죽이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상처가 낳은 비극 : 살아남고 싶으냐? 그럼 발버둥 쳐라. 지쳐 쓰러질 때 가장 비참하게 찢어 죽여줄 테니.
영원히 깨지 않는 악몽 : 인간의 피를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패악질을 부려도 이 악몽에선 깨어나지 못하는구나.
미련을 품은 마지막 발걸음 : 모든 것이 끝났지만,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다시 눈을 뜰 수만 있다면...

결국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채 긴 잠에 들겠구나.
허나, 허망하지는 않다.
나의 마지막 선택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되어 돌아올 테니.
어리석은 인간들아
여전히 나는 배신하지 않았다는 너희의 말을 믿지 않는다.
무너지는 세계의 균형은 머잖아 멸망이란 결과를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
하지만... 다가오는 멸망 속에서 너희가 살아남는다면,
그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도 여전히 배신하지 않았음을 간절히 탄원한다면,
훗날 다시금 눈을 뜬 내 앞에서 너희가 믿음을 잃지 않았음을 증명한다면,
그때는 다시 한번... 너희의 말을 들어주겠다.
그러니... 사력을 다해 살아남아 보거라.
마지막 꽃잎을... 피워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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