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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안녕, 나의 아라드. (1)

안녕, 나의 아라드



사범대 4학년, 낡은 과방 문을 열었을 때였다. 화면 속 고블린을 향해 무심하게 라이징샷을 쏘던 후배의 거너. 그 짧고 건조한 풍경이 내 긴 '던생'의 서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란플로리스의 숲부터 척1킹, 척2킹응 누비며 물리퇴마사로 전직하고 묵직하게 '저 하늘의 별'을 띄워 올리던 날들.


우연히 떨어진 '학자의 토시'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호하고, '대나무 팔찌'를 낀 캐릭터를 보며 뿌듯해하던 스물다섯의 내가 그곳에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낭만보다 3일간의 무한 피로도 이벤트가 더 간절했던 철없는 시절도 있었다. 사흘 밤낮을 하얗게 태워 50레벨을 달성했을 때, 현실에선 여자친구의 매서운 분노가 떨어졌다. 차갑게 식어버린 연인의 표정 앞에서도 속으로는 새로 배운 스킬을 떠올리며 남몰래 웃음 짓던, 어이없지만 그리운 날들이다.


임용고시라는 무거운 현실 앞에서도 아라드를 향한 발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좁은 자취방에 틀어박혀 피로도를 남김없이 녹여내고, 기어이 PC방까지 달려가 추가 피로도마저 태우던 숱한 밤들.


그러다 '군트람'이 떨어지던 순간 내질렀던 환호성,

'심장파열태도'를 쥐고 하늘성의 성주 지그하르트를 단숨에 베어 넘길 때의 그 짜릿함, 전장모드에서 모두가 "평화!" 를 외치다 소모품 파밍이 다됐을때 갑자기ㅜ서로 돌변해서 뒷통수를 치던 그 순간의 긴박감은 답답한 수험 생활과 임용의 부담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숨통이었다.


언더풋 지옥파티에서 '모건 스크래치'를 줍고 1,600만 골드에 팔아치운 날, 너무 기뻐 괴성을 지르다 옆방 원룸 아저씨에게 혼쭐이 났어도 그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임용 재수의 쓰라림 속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합격할 때까지만 던파를 참자.' 그리고 마침내 임용에 합격하던 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리둥절한 여자친구의 손을 이끌고 PC방으로 달려가 보란 듯이 던파를 켜는 것이었다.


교사로 발령받고 잠시 와우의 아제로스 세계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연어처럼 다시 던파로 돌아왔을 때, 손끝에 감기는 그 익숙한 타격감에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나의 이 지독한 애정은 결국 현실에 씁쓸한 상흔을 남겼다. 다시 던파를 하면 헤어지겠다던 연인에게 게임을 하다 들켰던 날. 싹싹 빌며 매달렸지만 결국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화려한 스킬 이펙트 뒤에는 서툰 청춘의 아픈 기억이 남았다.


그렇게 어떤 시즌은 건너뛰고, 또 어떤 시즌은 뜨겁게 즐기며 시간이 흘렀다. 이십 대의 사범대생은 어느덧 마흔을 넘긴 40대 초반의 중년교사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게임 속 캐릭터가 레벨업과 파밍을 거듭하는 동안, 화면 밖의 나 역시 현실의 퀘스트들을 클리어하며 나이를 먹어갔다.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 그리고 사십 대의 길목마다 때론 드문드문  때론 제법 진하게 던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고 길었던 모험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한때 나의 심장을 뛰게 했던 세계는 점점 낮아지는 서비스의 질과 무뎌진 애정 속에서 예전의 온기를 잃어버렸다. 소통이 아닌 자신의 아집을 강요하는 디렉터의 불통속에 던파를 관성처럼 부여잡고 있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후회는 없다. 아라드 대륙 곳곳에는 나의 가장 푸르렀던 시절, 서툴렀던 사랑, 그리고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으니까.

정말 많은 추억을 남기고 간다..


안녕, 나의 아라드. 안녕, 나의 찌질하고 또 눈부셨던 시절들. 이제는 정말, 너를 놓아줄 시간이다.


혹시 언젠가 또 어느 시즌에 너의 소식이 들린다면..

그땐 또 니가 잘되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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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v115
  • 교사의핵펀치
  • 진(眞) 스트라이커 카인 철용이파

    모험단Lv.43 태초비틱단속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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