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역지우 (37)
설정 토막으로만 알려진 달빛을 걷는 자 야신과 카시야스의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를 다뤄봤습니다.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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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파타를 죽인것이 이 녀석인가?"
도장에서 검술을 갈고닦던 소년이 검집에 검을 넣으며 말했다.
일련의 행동 하나에서도 고상한 노련미가 느껴지는 소년은 에컨의 유서깊은 귀족가문인 타오의 '야신' 이었다.
이미 다섯살 때 에컨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었던 천재 무도가 야신은 모두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국민들은 그가 토지 분쟁으로 황폐화된 에컨의 혼돈을 하나로 규합할 전설속의 영웅이라고 믿었다.
그는 실제로도 영웅에 걸맞는 인재였다.
귀족의 권위를 과신하지 않았고 아랫 것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주는 너그러움이 있었으며
투기가 전염되어 재난의 불씨가 생겨날 때 즈음 홀연히 나타나 분쟁의 싹을 척결하는 추진력 역시 갖추고 있었다.
"정황상 발파타가 수하들을 거느리고 잠입하여 야신님을 암살할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노비가 우연히 발파타와 마주친 것이겠지요."
하인의 말은 정확했다.
야신은 눈앞의 초라하기 짝이없는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그야말로 천하디 천한 노예의 모습. 하지만 그 눈빛과 몸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풍기고 있음을,
야신은 특출난 감으로서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득 몇년 전 고서에서 읽었던 전설 속 귀면족을 떠올렸다.
잔인하고 무심하며, 일인지하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숱한 피를 뿌린 악마
눈앞의 소년에게서 그러한 끼가 느껴진 것이다.
'이녀석 이라면..'
"이름을 알고싶군." 야신이 말했다.
"알아서 뭐할건데."
"이 천한 노비놈이! 감히 달빛을 걷는 자에게!"
"괜찮으니 말해 보아라."
야신은 귀족 특유의 품격있는 관용으로 소년을 대했다.
그의 흥미는 일개 하인들이 통제할 수 있는것이 아니었으므로.
"카시야스.. 장차 정복자가 될 몸이다."
"카시야스, 기억해두지."
그의 나이 12세, 정상의 위치에서 공허함에 찌들었던 그의 투기에 다시금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천귀살이다!"
"천귀살!"
"튕겼어!"
"튕겨냈다!"
"수십격을 모두 튕겨냈어!"
수많은 구경꾼들이 넒은 간격으로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둘의 대련이 예고될 쯤이면 에컨의 수많은 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며
마치 축제처럼 그들의 승부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두사람이 내뿜는 흉흉한 투기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싸움의 여파로 부상자가 생기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 환희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카시야스는 타오가문의 비천한 노예였으나
강자가 권력을 취하는 에컨의 법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주인이었던 야신만이 그의 검에 어울려줄 수 있었다.
둘의 싸움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눈동자를 분주하게 굴려도 작은 움직임 하나조차 쉽사리 포착할 수 없었으며
사방에서 금속이 맞부딧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오고 이후에는
멈췄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처럼 주위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귀면족은 재빨리 진을 옮겨갔고
싸움을 방해하지 않는 동시에 최대한 싸움을 가까이서 보고싶어 했다.
그정도로 둘의 검무는 비할데가 없었다.
하지만 범재들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진심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언젠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그 날을..
보름달이 영롱한 빛으로 에컨의 밤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 아래 모든것이 푸르게 물들은 에컨의 전경은 투쟁에 미쳐사는 귀면족 조차 그 흉흉함을 한수 접어두게 만들 것이다.
둘은 카시야스의 낡은 초가집에서 달빛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나 칼을 맞대고, 그것이 둘도없는 친우로 이어지기 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일찍이 에컨 내에서 적수를 찾지 못했던 야신과 유일하게 그의 검을 받아줄 수 있었던 카시야스.
두사람의 조화는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고 에컨의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에게 허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단 한가지의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겸손이었고, 배려였으며, 또한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했던 오만이었다.
"자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100가지 비술 있잖나."
대나무통 에서 입을 땐 카시야스가 말문을 열었다.
"말해라."
"그 비술을 모두 사용한다는건 자네가 전력을 다한다는 소리겠지?"
"그렇겠지."
"내가 지금까지 본 인술이 62가지인가."
잠자코 말을 듣던 야신은 내심 놀라워했다.
"기억하고 있었나."
"물론이지. 그런 진묘한 묘기는 잊을 수 있는게 아니야."
"그렇군."
둘은 한동안 달을 바라봤다.
그들을 비추던 달빛이 서서히 자리를 옮겨가고 이윽고 마루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부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군."
야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야신과 카시야스의 일기토는 언제나 관심과 환호가 동반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공허함 마저 감도는 평야, 그곳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박혀있는 주인잃은 무구들, 이를 둘러싸고 있는 드높은 산맥들.
유무를 알 수 없는 경건함이 풍겨오는 이곳은 귀면족들이 서로의 명예를 걸고 진검승부를 하기 위해 찾는 '파오언덕' 이었다.
아무도 없다. 하늘을 가득 메운 환호도, 광기로 번져가는 투기마저도.
두사람은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그날, 에컨 전체엔 터질듯한 굉음이 쉴 세 없이 울려퍼졌다.
철과 철이 부딧치고 쓸리는 소리와 무언가가 분쇄되는 소리가 파동처럼 터져 나갔으며
에컨의 주민들은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그 신성한 전투를 청취했다.
파오 언덕은 이미 온전한 형태를 잃은 상태였다.
수없는 발하는 불꽃은 협곡을 빠른 속도로 깎아냈으며,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드높은 암산이라 하더라도 여지없이 한줌의 파편이 되어 허공으로 흩날렸다.
찰나의 1초가 수백의 합이 되었으며 한번의 참격이 거대한 검기가 되어 모든것을 잘라냈다.
만약 이 진검승부를 목격한 이가 있다면 그는 필시 수천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거대한 용오름으로 거듭나는 광경을 연상했을 것이다.
둘은 이토록 고양되는 감정을 느낀적이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환희와 쾌감, 그리고 해방감.
설령 제몸을 불살라 하나의 투기로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싸움임에 틀림 없었다.
야신의 현란한 인술은 서서히 그 수가 더해졌고
그를 받아치는 카시야스의 이도류도 점점 힘을 더해갔다.
이대로 영원히 싸울 수 있을것만 같았다.
어느덧 카시야스는 전초전이 끝났다 여겨 자신의 실력을 조금 더 펼치기로 했다.
본디 싸움이란 서로의 기량을 확인하며 포대에 감싸져 있는 전력을 조금씩 벗겨내는 것.
카시야스는 고작 이정도의 혈투로 만족할 남자가 아니었고,
이는 야신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 될 수록, 카시야스의 만족감은 서서히 기울었다.
어느 순간부터 야신의 검술에 변칙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카시야스의 기대를 더욱 돋구었다.
그는 생각했다.
야신은 언제까지 제 실력을 내보이지 않을 셈인가.
아직도 숨기고 있는 수가 남아있는 건가?
허나, 무심결에 검무를 펼치는 야신의 얼굴을 보자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그의 표정은 더없이 필사적이었다.
파오 언덕에 신성함을 더해주었던 산맥이 허공을 날자
야신의 검날도 함께 허공을 날았다.
그의 붓질은 그대로 세상의 끝을 향했다.
모든것에 구애받지 않고, 지평선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하늘도 없고 땅도 없음이다.
천지는 거대한 화포일 뿐.
동생공사를 함께 해온 친우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다음 날. 파오 언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늘에 새겨진 정체 모를 붉은 선은 허공에 균열을 만들며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는데
지상에서도 정확히 평행된 위치에 이와 같은 협곡이 생겨나 마치 수면의 반사를 보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카시야스의 짓인지 야신의 짓인지를 두고 긴 시간 언쟁했으나
대관절 구경꾼이 없었으므로 누구의 짓인지도, 어느쪽이 승자인지도 영원히 알 수 없었다.
"야신! 달빛을 걷는 자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카시야스는! 그는 어딨지?! 야신!"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조급한 목소리에도 야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오언덕의 대결 이후, 카시야스는 사라졌고 야신은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했다.
소문은 무성했다. 카시야스가 야신을 이기고 더 강한 자를 찾아 떠났다는 설,
야신이 친우인 카시야스를 죽이고 상심에 빠져 은둔했다는 설...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허.."
언덕을 찾아온 귀면족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말도안돼는 괴물들이었군.."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야신은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야신은 결코 스스로를 과신하는 성품이 아니었지만 모두의 선망과 기대, 그리고 질투와 시기 속에서도 그 마음가짐을 유지하기란 힘든 것이었다.
어느덧 그는 자신이 정말로 전설속의 영웅이며, 가련한 민중을 하나로 규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분명 이타적이고 숭고하며, 뜻높은 신념이었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가지게 된 오만이기도 했다.
그는 은연중에 모든것을 굽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지금껏 카시야스에게 전력을 내보이지 않은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번의 뼈저린 경험이 현실을 뼈저리게 각인시켰다.
그는 전설속의 영웅도 최강도 아니었으며, 뼛속까지 스며드는 패배감과 분노는 그가 고상하며 품격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만들었다.
눈높이를 낮춰주고 있던건 자신이 아니라 카시야스라는 사실에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하나뿐인 친우를 실망시켰다는 것이다.
야신은 모든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카시야스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어딘가에서 자신을 아우르는 강자와 싸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파오 가문을 견제하던 포르 가문이 세를 넒혀 귀면족들의 분쟁이 심해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억지로 지탱하고 있는 균형은 언젠가 무너질 운명이지 않은가.
모든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단 하나 신경쓰이고 있는 것.
카시야스의 참격이 하늘에 수놓은 거대한 이음매. 그 사이에 만들어진 균열이 점점 커지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그것이 하늘을 조각내어 속에 담긴 혼탁한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야신은 그것 마저 외면하려 했다.
귀면족은 어차피 자멸할 민족, 저 이음매가 천지를 두갈래로 가르더라도 결국은 정해진 수순을 밟을 뿐이다.
"...."
야신은 성채의 꼭대기를 올랐다.
보름달과 겹쳐진 균열은 그 빛을 먹어치우고 있어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을 연상시켰다.
귀면족들은 투기에 미쳐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지만 야신은 아니었다.
모든 속세를 벗어나고 싶었음에도 에컨은 여전히 그와 그의 친우의 고향이지 않은가.
그렇게 야신은 틈새로 향했다.
"이봐! 언제까지 날 끌고다닐 셈이야!"
"전 연약하니까요. 카시야스님 같은 호걸이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된답니다."
"젠장!"
카시야스가 궁시렁 거리며 힐더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갔다.
운이 좋다면 차원의 틈에서 강자를 맞이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카시야스는
그녀를 따라 하루를 꼬박 날려먹은 것이다.
중간 중간 길목을 가로막는 마수들을 몇몇 만나기는 했지만 손맛을 느끼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반푼이들 뿐이었다.
힐더는 차원의 균열이 발생한 곳을 수색하고 있었다.
최근 마계를 감싸고 있는 이공간의 경계가 눈에띄게 약해져 차원의 균열이 발생하는 빈도가 잦아진 것이다.
흔적을 따라간 끝에 도달한 곳은 퀸즈의 '루즈밸트 아일랜드'.
이곳은 오래전, 이미 칙칙한 폐허가 되어 사람들의 족적이 묘연해진 곳이었다.
"이런 곳에 정말 차원의 틈이 있단 말이야?"
"네,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힐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를 따라 지루한 걸음을 이어가다 보니 정말로 일그러진 차원의 틈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틈 중앙에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있었다. 그는 검을 쥐고 있었다.
'보람이 있었군..!' 카시야스는 저자가 틀림없이 자신을 즐겁게 해줄 강자라고 확신했다.
힐더는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 카시야스는 호기로운 기세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느세 둘은 남자의 형상을 뚜렷하게 인식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남자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난생 느껴보는 공기와 건축물, 읽을 수 없는 글자, 자신들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다른 여자.
모든것이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였다.
"솟아난 뿔과 복장의 양식, 아마도 카시야스님과 같은 종족인 것 같군요. 혹시 면식이 있나요?"
힐더가 절벽위의 사내를 지긋이 관찰하며 넌지시 질문했다.
"... 아무렴, 알고말고."
야신은 마계를 떠돌며 여행자를 자처했다.
에컨과 연결된 균열은 닫혔으니 더이상 그가 귀면족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살아갈테니까.
때문에 야신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자 했으나 당장은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기에,
더 넒은 세계와 더 많은 존재들을 접하며 속세에 얽매이고자 했다.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자연히 그 답을 알게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계는 상상 이상으로 척박한 곳이었다.
가는 곳 마다 도적대와 마물들을 마주했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약탈과 죽음이 난무했다.
그야말로 죽음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조용할 날이 없다는 점에선 에컨과 같았지만 투쟁이 문화로서 자리잡은 에컨과는 달리
모든것이 무질서와 혼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야신은 불의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 다녔다. 비록 자경활동을 목적으로 둔것은 아니었으나,
도저히 외면하기 힘든 참상들이 그의 양심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여행이 계속 될 수록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을 타고 퍼졌으며, 어느센가 그는 마계인들의 등불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의로운 자여, 감히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부리나케 도망치는 카쉬파의 단원들을 뒤로하고, 야신은 저도 모르게 경건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난 말일세, 이곳의 사도라네."
"사도?"
"마계를 구하기 위해 운명적으로 모인 수호자라는 소리지! 와하하!"
사도, 저마다 다른 세계에서 마계로 넘어온 선택받은 강자들. 처음 카시야스의 말을 들었을 땐 잘 와닿지 않았다.
그 자리는 술판이었고 카시야스는 오랜 친우와의 재회로 상당히 천진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니, 이 얼마나 강대하고, 이 얼마나 신성한가.
그는 자신이 영웅으로 불렸던 시절을 회상하며 자조적인 수심을 곱씹었다.
"야신, 달빛을 걷는 자 야신이오."
"야신이여, 언제나 창공에서 그대를 지켜보겠네."
이시스 프레이가 그를 축복했다.
"아저씨가 내 친구를 구해준 사람 맞죠? 정말 카시야스 님이랑 친구에요? 그럼 내 친구나 다름없네!"
피피는 야신의 품 안으로 별안간 안겨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친구라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녀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기에 야신은 그저 멍하니 피피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분명 난처한 것이리라.
"하하, 죄송합니다. 워낙 사교성이 좋은 아이라.."
카시야스와 케이트는 먼 발치에서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떻지?"
"많이 호전됐어요.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 날뻔 했네요. 야신님 덕분이에요."
"아저씨! 아저씨도 카시야스님 처럼 엄청 강하죠?! 아저씨랑 카시야스님이랑 싸워본적 있어요?!"
"얘도 참!"
"피피, 말 많아."
니우와 파이가 동시에 피피를 나무랐다.
꽃다운 소녀들 사이에 도깨비같은 남자가 하나,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상황이었으나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무너진 판자집.
주검이 되어 널부러진 카쉬파 단원들.
생가죽이 벗겨진 수인의 시체가 셋.
이것은 마계의 널리고 널린 가정중의 하나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이 소녀 역시 그들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히 유린당했을 터.
야신의 귀면검은 더러운 피를 뚝뚝 떨구고 있었다.
방금까지 광소를 내지르며 소녀의 가족을 찢어발긴 자들의 것이리라
야신은 소녀를 바라봤다.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으며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살았으되 죽은 자였다.
"......"
야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것이 둘 사이에 울적한 정적을 형성했다.
그가 하고싶은 것,
그 답을 지금 찾은것 같았다.
"나와 함께 가겠나."
소녀는 초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폭포를 등진 한산한 숲속 어딘가.
사냥으로 잡아들인 마물들이 노릇하게 구워져 군침도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얼마 전 까지, 둘은 대련을 하고 있었다.
야신은 검지와 중지만을, 자켈리네는 있는 힘을 다해서 덤벼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관문이었다. 통과조건은 야신이 한손을 모두 사용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사흘 밤낮을 덤벼든 끝에, 그녀는 드디어 관문을 통과했다.
"안드시나요?"
자켈리네가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다소 옹알거리듯이 물었다. 야신은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는 소박히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켈리네를 보살핀지 어느덧 4년이 흘렀다.
그녀는 검술에 재능이 출중하여 배움이 빨랐고, 야신의 말 하나 하나에서 교훈을 얻었으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에서는 기특함 마저 느껴졌다.
에컨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 소박함, 그리고 가족, 야신은 자신이 찾던 행복에 도달하는 듯 했다.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면 그녀에게 애검 귀면도를 물려주리라.
"...."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으나, 그로인한 공허함은 또렷하게 느껴진다.
대체 무엇일까.
자켈리네는 그 모습을 연신 쳐다보다 살짝 떠보듯이 말했다.
"스승님은 정말로 카시야스님과 무예를 나누던 절친이었나요?"
야신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잘 모르겠군."
"자켈리네는 괜찮나요?"
니우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걱정마렴, 힐더님이 주신 해독제 덕분에 많이 호전되었단다."
"그나저나, 이 목에 있는 이빨자국은 대체.."
"나도 잘 모르겠구나. 힐더님이 카시야스 님과 함께 조사를 나가셨으니, 곧 알게 되겠지."
케이트는 곤히 자고있는 자켈리네의 이마를 쓸었다.
야신이 행방불명 되자 자켈리네는 이것이 그를 벼르고 있던 카쉬파의 소행일 것이라 판단해 할렘으로 감행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지만 일가가 모두 몰살당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등불은 바로 야신이 아닌가.
그녀의 입장에선 하나뿐인 가족을 잃는것이 죽음보다도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그것보다.. 야신님은 대체.."
-
야신은 메트로 센터의 고지에서 한 성채를 바라봤다. 억겁의 세월을 거슬러 마계를 배신한 용이 도망칠때 올랐다는 '죽은자의 성'이다.
평소에도 음산한 기운을 머금고 있던 죽은자의 성은 오늘따라 그 부정한 힘을 짙게 내뿜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최근 마계를 유랑하던 실력자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고 하는데,
야신은 그 사건이 죽은자의 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보기만 해도 정신을 잃을것만 같은 저 혼탁한 검은 안개, 힘을 갈망하는 우자들을 끌어 모으기에 부족함 없지 않은가.
저것을 그대로 두다간 필시 세계를 파멸로 이끌 것임이 분명했다.
야신은 숭고한 의지를 품고 깊고 어두운 악몽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하지만 야신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선택받았고, 그자의 달콤한 부름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려왔다는 사실을..
너는 약하다. 약해빠졌다.
너는 전설속의 영웅도 아니며 그저 오만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뿐인 겁쟁이에 불과하다.
"시끄럽다."
너는 스스로를 고귀한 존재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한꺼풀 벗어놓고 보면 어떤가?
그토록 원하던 가족을 얻어도, 막중한 책임을 내려놓고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해도 네 마음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얄팍한 수단들로 매꿀 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 혼탁한 존재여."
카시야스에게 패배한 순간부터, 아니지.
카시야스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한' 순간부터 너는 죽은 것이다.
"아니다! 당장! 사라져라!"
"그를 호적수라고 생각했겠지, 지루한 인생을 즐겁게 만들어줄 인연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론 그가 자신보다 한수 아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거야. 응? 그렇지 않나?
"나가라!"
하하하! 웃기는구나! 제 주제도 모르고 스스로에 도취되어 눈이 멀다니!
네가 느끼는 마음의 공허는 네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넌 내색하지 않은척 하지만
여전히 패배자이고! 여전히 그에게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 패배감을 잊을 무언가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자켈리네 역시 그 수단의 일부일 뿐이지!
"자켈리네는 나의 제자다! 같잖은 호설팔도는 집어치우고 썩 나가란 말이다!"
가문의 자랑인 100가지의 비술이 하나 하나 공략당해갔을 때, 그 기분은 어땠나?
"...."
수를 더해갈 때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볍게 파훼될 때, 95, 96, 97,
자랑스럽게 쌓아온 전투경험이 마지막 까지 몰렸을 때, 그 초조함을 기억하는가?
"그만.."
그를 이기고 싶지 않은가?
'정복자 카시야스' 를 무릎 꿇리고 그를 굽어보고 싶지 않은가?
"그는 나의 친우다...."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지 않은가?
"그는.."
검은 악몽은 생명체의 밝은 기운을 빼앗고,
종국에는 부정적인 감정만을 남게 한다.
"이봐 야신!"
"말해라."
"넌 왜 이렇게 강한거냐!"
"나는 중턱에도 오르지 못했다."
"엑! 중턱도 안되는 거냐!"
"무의 세계는 넒으니까."
"그럼 언젠가 내가 너를 추월하는것도 꿈은 아니겠군!"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지."
대관절 이 까마득한 기억은 대체 뭐지...
야신은 알 수 없었다.
-
[실험실 공략 4일 째]
"저것 보세요! 생산 라인이 멈추고 있어요!"
"성소쪽 녀석들이 잘 해주고 있나보군."
카시야스가 노련한 움직임으로 칼을 거두었다.
숨겨왔던 야욕을 드러내어 쿠테타를 꿰한 건설자 루크. 그의 실험실에 들어선지 어느덧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그는 아랫세계의 모든 빛을 빼앗아 자신의 힘으로 삼을 속셈인듯 했지만,
"아니, 그래서는 안되지, 내 장난감들이 그곳에 있는데."
루크가 어디서 뭔 짓을 하든, 카시야스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아라드와 천계를 멸망시키려는 속셈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래서,"
카시야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어디쯤인지 짐작가는 사람 있나?"
"그게.. 음.. 아! 걱정 마세요! 제가 풀어놓았던 미니 탐사봇이 돌아온 참이니까요!"
한 당돌한 마도학자가 쪼그려 앉아 통통 튀는 눈사람을 받아들어 그것의 말에 귀 귀울였다.
"음.. 음음!"
마도학자는 완전히 이해 했다는 듯 일어서서 자신있게 말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마도학자는 반의 말을 반쯤은 흘려듣듯이 말을 이어갔다.
"왜냐하면 이 반대편에 무지막지하게 강한 녀석이 있다고 하니까요!"
"그래?"
카시야스의 귀가 솔깃해졌다.
"원래 왕은 강한 신하를 곁에두기 마련 아니겠어요? 오호ㅎ"
그때였다.
벽 너머에서 한줄기 섬광이 관통해 들어온 것이다.
마치 잘 꾸며놓은 연극 무대판이 엎어지듯이, 벽은 수많은 파편으로 조각나 그들을 덮쳤다.
"히이익!"
카시야스는 무서운 기세의 철탄을 가볍게 쳐내고, 그 뒤로 덮쳐들어오는 섬광의 검기를 받아냈다.
검기는 천장을 뚫고 그대로 지면을 향해 뻗어올랐다. 카시야스는 생각했다. '메트로 센터가 엉망이 됐겠군..'
한차례의 격돌이 빚어낸 흙먼지 속에서 마침내 기습의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라.."
"...예?"
"어줍잖게 힘을 온존하며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니까."
카시야스가 검을 뽑으며 명령했다.
"알고 있다. 비장의 수를 남겨두고 있다는 거, 영감을 상대하기 위해서겠지. 그러니 어서 가라."
반은 카시야스의 무뚝뚝한 등을 연신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토벌대와 함께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남은것은 두사람 뿐이었다.
"....."
"추한 몰골이 되었군."
카시야스가 말했다.
"기억하는가 야신, 나는 정말로, 우리가 신성한 언덕에서 명예를 건 결투를 치르기 직전까지도, 자네가 나보다 강할것이라 생각했네."
야신은 말이 없었다.
"듣지 않는가.. 하긴, 이제와서 말해봐야.."
카시야스가 팔을 올려 야신을 겨누었다.
"지금 자네가 어떤 상태인지 깨닫는다면 자네는 필시 자결하고 말겠지. 죄악감에 몸부림 치며 말이야."
"적인가."
"금방 편하게 해줄테니 걱정 말게, 나의 오랜 친우여."
"드디어 시험해볼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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