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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지역 : 할렘

스토리

 

센트럴파크의 소녀


1. 소녀 마법사의 어느 날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센 숫자에 맞추어 파이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평소에 쓰던 얼음 계통의 마법이 아닌, 숲에 가득 찬 다양한 원소를 활용한 새로운 마법이었다. 초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작은 빛이 깜빡거리더니 이윽고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앗..."

 

마력의 응축이 풀리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파앙!

하지만 보람도 없게 마법은 실패해 버렸다. 작은 폭발음과 함께 마력이 흩날려 날아갔다. 잠시 눈에 보인 비산하는 빛의 무리를 멍하니 보던 파이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벌써 몇 번째지.

여러 속성을 섞은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릴 때부터 한 계통의 마법에 치중한 파이에게는 더더욱. 파이는 땀에 젖어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나무에 기대었다. 사그락사그락.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의 소리가 조용히 파이를 위로해 주었다.

니우가 수호자들과 함께 센트럴파크의 바깥으로 나간 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평소에도 혼자서 마계를 여행하며 이변을 찾아내고 사람들을 돕는 니우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갔으니 안심이 되어야 할 텐데, 어쩐 일인지 마음이 영 좋질 못 하다. 

 

'나는 지금 걱정하는 걸까?'

 

'응. 맞아.'

 

'니우 언니를 걱정하는 걸까?'

 

'그것도 맞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냐...'

 

파이는 지팡이를 꼭 끌어안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웨리가 사라진 후 케이트가 새로 만들어 준 것이다. 수다쟁이에 성격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함께일 줄 알았던 웨리가 갑자기 곁을 떠난 후 파이는 마법에 자신을 잃었다. 기죽은 파이를 위해 케이트가 오래된 정령수를 깎아 만들어 준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지팡이다. 케이트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파이는 웨리의 부재가 계속 신경 쓰였다. 

 

'내가 언제까지고 약한 채로 있으니까...'

 

파이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늘 단련하고 있는 니우와 비교 할 수 없이 약하다. 아무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남을 도울 수 있을까? 의지가 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니우는 말했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언제나 그렇게 말해주었다. 지금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파이 언니! 어딨어요? 빨리 안 오면 파이 다 먹어버릴 거예요~!!"

 

밝아졌던 파이의 얼굴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센트럴파크. 소환사로 유명한 케이트가 만들어 낸 기적의 숲. 마계에 어둠만이 가득한 시절부터 조금씩 숲을 키워 온 케이트는 자신을 중심으로 모인 마법사들과 함께 마을을 만들어 조용히 살고 있다. 파이와 피피 역시 케이트의 가족과 다름없는 소녀들로, 나이는 어리지만 각 분야의 뛰어난 마법사다.

하지만 볼이 부은 채 입을 삐죽이 내밀고 앞장서서 걷는 파이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피피의 모습은 신비의 결정체인 마법과 동떨어져 있었다. 

 

"왜 또 싸우고 그래?" 

 

테이블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던 붉은 마녀가 새초롬히 물었다. 

 

"누가 더 많이 먹을지 가위바위보라도 한 거야? 파이가 지기라도 했어?"

"아니야. 화 안 났으니 신경 쓰지 마."

 

명백히 화난 얼굴로 말하는 파이. 지은 죄가 있는 피피는 제발 넘어가달라며 두 손을 마구 휘저었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지만 곤란한 상황을 파악한 붉은 마녀가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애?" 얌전한 소년 요슈아는 닥쳐올 파란을 예감하고 얼른 컵과 접시를 들어올렸다.

 

"와아! 맛있는 냄새!"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테이블이 뒤집어질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갓 구운 빵의 냄새에 흠뻑 취해 인사도 잊고 달려오는 낯익은 소년의 등장으로 화제가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븐에서 마지막 쿠키를 꺼내던 케이트가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서. 이시스-프레이 님은 건강하시니?"

 

 

2. 멀리서 불어온 바람

"...그렇게 해서 프레이 님은 또 한 명의 가련한 마계인을 구하셨지요!"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서의 얼굴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먹으며 말하느라 빵가루를 튀기지만 않았어도 사도의 신실한 추종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시스-프레이 님은 어디서 오신 거죠?"

 

피피의 눈빛을 똑바로 받게 된 아서는 살짝 붉어진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프레이 님도 잘 말씀해 주지 않아요. 몇 번 여쭤봤는데, 그저 제가 알 필요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시죠. 갈 수 없는 곳이니 괜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겠지만... 고향을 생각하시는 프레이 님의 눈빛을 생각하면 저도 조금 슬퍼져요."

 

"그렇게 열심히 따르면서 아는 건 없나 보네."

 

아서는 곧바로 붉은 마녀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 여자를 상대로 말싸움을 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아서는 대꾸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결코 이전의 상처가 아직도 쓰라리기 때문이 아니다. 소년의 마음을 짐작한 케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프레이 님이 마계를 잘 이끌어주셔서 다행이야. 그분이 날개를 펴고 순찰을 나가시면 카쉬파나 도적 떼도 수그러드니까. 그런데 아서. 오늘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니?"

 

"아 참. 까먹을 뻔했네요. 카쉬파의 동향을 듣고 와달라고 하셔서요. 니우 양은 나갔나요?"

 

"니우는 할렘 주변을 살펴보러 갔단다. 어쩌면 엘팅 메모리얼에 들렀다 오는 걸 수도 있겠어."

 

아서가 얼굴을 찡그렸다. 

엘팅 메모리얼. 마도학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위험한 실험을 하느라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 하지만 무엇보다 아서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힐더의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카쉬파에 대항하지 않고 중립을 내세우는 그들의 태도이다.

사실, 엘팅 메모리얼은 이미 카쉬파의 지배 구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카쉬파들의 본거지인 할렘 바로 옆에 있으면서 그들의 연구 협력 요청에 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카쉬파의 리더인 검은 눈의 사르포자도 힐더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은지 그들의 중립 선언을 존중한다는 선언을 했다. 엘팅 메모리얼에서 괴짜를 빼고 나면 남는 거라곤 오래된 책뿐이니,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소유권을 주장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아서는 더 화가 났다. 엘팅 메모리얼의 마도학자들이 제정신이라면 현 상황에 만족하면 안 된다. 어째서 카쉬파에 대항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심지어 힐더 님의 지원을 받기까지 하면서. 그들이 센트럴파크의 마법사들과 협력하여 카쉬파를 압박하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마도학자가 일반인과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지만, 마계인으로서 자각을 가지고 위대한 이시스-프레이 님의 정의로운 마음을 좀 배워야 한다. 남의 눈을 피해 끔찍한 실험이나 하는 게 아니라.

 

"카쉬파는 할렘 바깥에서 온 사람을 '외부인'이라고 부른다며? 엘팅 메모리얼 사람들도 그럴까?"

 

"그 사람들도 꽤나 폐쇄적이니 그러지 않을까? 카쉬파도 그쪽을 드나들곤 하니, 영향을 받았겠지."

 

"좋지 않네요. 마계인끼리 편을 가르는 거. 어서 평화로운 날이 오면 좋겠어요. 착하고 좋은 사람만 남아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마계도 행복해질 텐데."

 

누군가를 떠올린 것인지 우울한 얼굴로 말하는 피피를 몰래, 하지만 뚫어져라 보던 아서가 파이에게 손등을 꼬집혔다. "정신 차려." 얼굴이 새빨개진 아서가 변명을 주워섬기려던 그때.

바람이 불었다.  

돌풍지대에서 오곤 하던 일상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력의 파동에 의해 생긴 대기의 떨림이었다. 마나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자일수록 이 움직임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 것이다. 아이들의 대화를 따뜻하게 지켜보고 있던 케이트의 눈빛이 가장 먼저 변했다. 붉은 마녀는 입술을 깨물었고 피피는 주먹을 꼭 쥐었다. 요슈아는 할렘 방향을 살펴보았으며 파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프레이 님이 노여워하고 계세요."

 

넋이 나간듯 중얼거린 아서가 제 말에 흠칫했다. "프레이 님이 노여워하고 계셔... 그분께 무슨 일이?!" 너무 급하게 일어선 탓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넘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돌아갈게요!"

 

"아서! 기다려!"

 

아서는 케이트의 만류도 듣지 않고 달렸다. 바람을 몸에 두르고 달리기 시작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신이나 다름없는, 아니, 신 그 자체인 이시스-프레이의 안위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모처럼의 파티가 갑작스레 끝났다. 붉은 마녀는 고운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더니 인사도 없이 쌩하니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케이트 역시 피피와 함께 숲으로 향했고, 요슈아는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할렘이 잘 보이는 황무지의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커다란 테이블에 혼자 남게 된 파이는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3. 고민하는 파이

다음날. 케이트는 피피와 파이 앞에서 그리 큰일이 아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피피는 밝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겠죠? 혹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프레이 님이 처리해 주실 테니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넘기기엔 아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말해보았지만 케이트는 그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이미 사태가 끝났을 테니 안심하라며 파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이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내가 니우 언니였다면...'

 

강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랬다면 케이트의 말도 달라졌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겠지.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놓고 의논하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우는 자리를 비웠고, 피피는 어리다. 그리고 자신은...

 

"나, 산책 좀 다녀올게."

 

파이는 케이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숲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나무가 작은 몸을 금세 숨겼다. 얼마 들어가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마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센트럴파크의 숲은 넓다. 모험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조금 더 넓어졌다. 모험가가 사도 루크가 있는 죽은 자의 성으로 떠난 후, 케이트는 슬픈 얼굴을 감추며 '이제 잘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애써 잊으려는 듯 나무와 풀의 관리에 더 신경을 썼다. 파이도 열심히 도왔지만 의지가 되기는커녕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 쉬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케이트 나름의 상냥함이겠지만, 파이는 조금 상처를 받았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천성이 연약하여 마법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도, 가족과 떨어져 니우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도. 모두 걱정만 했다. 파이 스스로도 염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자신을 믿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왜 모두들 나를 감싸고 보호하려고만 할까.

 

"나도... 마법사야."

 

바위에 걸터앉았다. 마법사는 죽음 곁에서 걷는 자다. 제아무리 위대한 마법사라도 작은 실수 하나에 온몸의 마력이 폭주하여 고통 속에 숨이 끊어질 수 있다. 죽지도 못하고 미쳐버릴 수도 있다. 재능 있는 자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힘들고 무서운 길이다. 하지만 파이는 자신에게 마법적 재능이 있음을 감사하며 살았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로는 후회 같은 건 한 마디도 한 적 없다. 그런데도 아직 부족해 보이는 걸까?

 

"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빨리 언니들처럼 될 수 있을까? 

니우처럼 카쉬파와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케이트처럼 명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을 돕고 싶지만 이제 와서 모르는 마을에 찾아가기엔 조금 부끄럽다. 말도 없이 멀리 떠나 걱정을 끼치기도 싫고.

그래서 파이는 센트럴파크의 가장자리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그곳은 센트럴파크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자주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간혹 목숨이 위태로운 이들이 쓰러져 있기도 하여 주기적으로 살펴보곤 한다.

혼자서는 자주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살짝 긴장한 채 걷던 파이는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나뭇잎과 풀잎에 시야가 가려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의 마력을 감지하려고 해도 얼마 전, 케이트가 숲에 걸어놓은 마법 때문에 방해가 생겨 쉽지 않았다. 파이가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겨 주변을 살펴보고 있을 때,

 

"에비."

 

"꺄아아악!"

 

나이스 샷! 온 힘을 끌어 휘두른 파이의 지팡이에 뭔가가 맞았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요슈아였다. 평소엔 하지도 않던 장난을 한 대가로 얻어맞은 소년은 다행히 머리에 직격은 피했으나 등뼈의 안전은 지키지 못했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는 요슈아를 보며 파이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게 왜 놀래켰어?"

 

"기분이 나빠 보이길래 장난 좀 쳐봤어요... 어디 가는 거예요?"

 

파이는 입을 오물거렸다. "외곽 숲."

 

"거긴 왜요? 저 지금 황무지에서 오는 길인데 별일 없어요."

 

실망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이네, 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었다. 파이가 어두운 얼굴로 끄덕이는 모습을 본 요슈아가 콧잔등을 긁적였다.

 

"같이 가요."

 

"같이?"

 

"바람 쐬러 가는 거라면 혼자보다 둘이 낫죠? 동물이 쓰러져 있다면 혼자보다 둘이 옮기기 쉬울 거고."

 

파이는 잠깐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4. 방문객

센트럴파크의 외곽 숲. 외곽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곳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굳이 '외곽 숲'이라고 말한다면 할렘 방향에 있는 황무지 근처의 숲을 가리키곤 한다. 넓은 황무지 건너에는 '타락한 숲'과 카쉬파의 본거지인 할렘이 있다. 타락한 숲 역시 원래 케이트의 마법 덕분에 커진 숲이지만 이곳과 달리 무척 어둡고 사악한 기운이 퍼져 있다. 파이는 이름 때문에라도 그 숲이 영영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락한 마법사들의 집단인 카쉬파만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려나."

 

"네? 뭐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앞서 가던 요슈아는 그저 싱긋 웃더니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파이는 그 등을 보며 카쉬파 소속이었던 이 소년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지금의 요슈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당시의 모습을 설명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밝은 소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슬픔과 분노에 잠겨 있었다는 걸 누가 믿을까? 케이트와 카시야스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소년은 오늘까지도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요슈아가 센트럴파크로 들어올 때... 카시야스 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어?"

 

무섭고 무뚝뚝한 카시야스가 도대체 뭐라고 말했을지 늘 궁금하던 파이였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끌리는 방향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라고. 괴로울 정도로 고민해 봤자 마지막에는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니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빠져나오는 게 현명하다고."

 

"정말? 카시야스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물론 케이트 님의 해석이 300% 정도 들어갔지만요."

 

"그게 뭐야."

 

소년소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느새 무거운 마음은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파이는 한 손에 든 지팡이를 휘릭휘릭 까불거렸다.

 

"있지. 요슈아는 많이 싸워봤어?"

 

"자란 환경이 그랬으니 안 싸워보지는 않았죠. 파이 씨는 싸우고 싶나요?"

 

"아니... 근데 안 싸울 수도 없잖아. 도움이 되려면."

 

"그런가요?"

 

요슈아는 여상스럽게 말했으나 파이는 왠지 떼를 쓰고 있는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다. 방해될 게 뻔한데, 싸우겠다고 나서는 것도 민폐 아닐까? 파이는 괜스레 지팡이로 땅을 툭툭 쳤다. 흙모래가 튀었다. 평소라면 지팡이에 상처가 난다며 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흙 같은 우울함에 푹 빠지고 말 것만 같다. 파이는 앞서가는 요슈아가 맞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지팡이를 몇 번 더 휘둘렀다. 요슈아가 파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입가에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나무 뒤로 조용히 끌었다. 

 

"누가 있어요... 아까 지나올 때는 아무도 없었어요. 막 황무지를 건너왔나 보네요."

 

두 사람은 바위에 기대어 쉬고 있는 낯선 이를 관찰했다.

마법사라 칭할 정도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허리에 찬 몇 자루의 단검과 얼굴에 있는 상처를 보면 선뜻 다가가고 싶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모험가나 여행객일까? 요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방인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요슈아는 조금 멀리 있는 나무를 향해 얼음 조각을 날렸다.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흔들리자 이방인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하루 이틀 이런 생활을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흔들린 나무가 아니라 두 사람이 있는 근처로 다가왔다. 

 

"숲의 마녀인가? 해치지 않을 테니 나와줘. 이쪽은 싸울 마음 없어."

 

험상궂은 외모만큼이나 걸걸한 목소리였다. 파이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요슈아가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올려다보자 싱긋 웃고 있었다.

요슈아는 파이에게 가만히 있으라 손짓을 한 후 나무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상인이야. 도망치던 중이지. 너 혼자 있는 거냐?"

 

"센트럴파크를 찾아오신 건가요?"

 

"말했잖아. 도망치던 중이라고. 갈 데가 달리 생각나지 않았어. 황무지를 건너면서 죽는 줄 알았지 뭐야."

 

자칭 상인은 얼굴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정면을 보니 한쪽 귀의 반이 잘려나가 있었다. 눈만 빼꼼 내밀어 지켜보던 파이는 움찔하였으나, 피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오래된 상처인 듯했다. 

 

"다치셨어요? 어디로 가는 길이세요?"

 

"뭐, 여기저기 떠돌아 볼까 하고... 그런데 한 명 더 있지 않아?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그쪽도 얼굴을 다 보여주는 게 안심될 거 같은데."

 

파이가 머뭇거리며 얼굴을 드러내자 상인은 껄껄 웃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안 잡아먹어. 어디 보자. 대가로 줄 만한 건 이 단검뿐인데 써보겠어? 아참. 내 이름은 쇼필드야."

 

쇼필드는 녹슨 단검을 들어 보이며 크게 웃었다. 파이는 그의 커다랗고 싯누런 송곳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5. 각자의 고민

쇼필드는 카쉬파가 지배하는 할렘에서 왔다고 했다. 애인에게 차여 실의에 빠진 마음을 달래러 도박을 하러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할렘에서 장사를 하셨다고요?"

 

"어어, 그래. 내가 마법은 못 배웠어도 그런 쪽으로는 아주 타고났거든. 처음엔 눈치 보기 바빴지만 요령이 생기더라고. 조금씩 밑천을 모아서 이것저것 팔았지. 번 돈은 그날그날 날려 먹었지만, 뭐, 적당히 놀 만했어."

 

"그런데 왜 도망치신 거죠?"

 

쇼필드는 털이 군데군데 엉킨 꼬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었다.

 

"그거야, 그거. 치정 싸움. 치정 싸움에 얽혔어. 카지노의 보스는 호색한이거든. 이쁘장한 딜러하고 분위기가 좋게 흘렀는데 하필이면 보스가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했나 보더라고. 알자마자 바로 도망쳤지. 간부가 힘없는 외부인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잖아? 그런데 나오다가 사냥꾼에게 잘못 걸렸어."

 

"헤에..."

 

"황무지까지 건너서 쫓아올 거 같진 않지만 기력이 없어. 밥 좀 얻어먹으면 살 것 같은데..."

 

"알겠어요. 이곳에서 조용히 계실 수 있다면 식사 정도는 드릴게요."

 

요슈아는 쇼필드가 무섭지도 않은지 시종일관 붙임성 있는 태도였다. 반면 파이는 요슈아 옆에 숨고선 이 말 많은 방문객을 곁눈질로 관찰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깜짝 놀라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어물쩍 넘기기에는 너무나 빤히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쇼필드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낡은 단검을 모두 바닥에 버렸다.

 

"이러면 돼? 조심성 많은 건 좋은데 나는 진짜 배고픈 도망자라니까. 로카족 중에서도 내가 좀 무섭게 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렇게 계속 흘끔거려서야 얻을 패도 다 놓치고 만다고."

 

파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미안..."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본격적으로 센트럴파크라고 할 만한 중심부의 숲에 이르렀을 때, "어이쿠!" 쇼필드가 요란하게 넘어졌다. 살펴보니 침입자를 막기 위한 덫 마법에 그의 다리가 걸린 것이었다. 파르스름한 마법의 빛이 쇼필드의 마르고 억센 다리를 꽉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는 쇼필드 앞에서 요슈아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마녀님의 마법이라 저희는 못 풀겠는데요... 잘못 해제했다간 이 일대에 숨어있는 덫 마법이 일제히 폭발해 버릴지도..."

 

"뭐? 아이고... 이거 점점 죄어온단 말이야! 빨리 어떻게든 해 봐!!"

 

"마녀님을 찾아올게요. 파이 씨, 이곳에서 같이 기다려 줄래요? 금방 갔다 올게요!"

 

요슈아는 파이의 말을 듣지도 않고 홀로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파이는 낯선 사람과 단둘만 남은 상황이 무척 거북했다. 하지만 쇼필드가 땅에 드러누워 나 살리라고 고함을 지르는 통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숲에 사는 난폭한 정령이나 사나운 동물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파이는 쇼필드의 다리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금만 참아. 덫의 힘을 조금 약하게 할 테니까..."

 

"아야야, 아야, 야야야야, 약하게 하고 있는 거 맞아? 아야야야야야!!"

 

쇼필드의 비명은 점점 더 커졌지만 덫은 해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이는 입술을 깨물며 술식을 해석하기 위해 집중했다. 

 

'요슈아가 도와주면 좀 더 빨리 해석할 수 있을 텐데.' 

 

'옆에서 아픈 비명을 지르니까 집중하기가 힘들어...'

 

'이 술식은 뭘까? 내가 보던 거랑 많이 달라...'

 

파이는 쇼필드를 보았다. 크고 작은 상처가 몸에 남아 있다. 저렇게 험한 일을 겪은 사람이 참지 못하고 아파하는데, 자신은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나 한스러웠다. 파이는 요슈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마녀를 데리고 오겠다던 소년은 아직 소식이 없다. 멀리 있는 걸까? 지금 어디쯤일까? 어서 왔으면 하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파이의 손을 쇼필드가 잡았다.

 

"하, 아무리 꼬마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네."

 

"어..."

 

"뭐해? 빨리 일으켜!"

 

호통 소리에 어깨를 움츠린 파이가 조심조심 쇼필드를 도와 앉혔다. 쇼필드는 갖은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뒤춤에서 잘 벼린 단검을 꺼내었다. "앗..." 깜짝 놀란 파이가 뒤로 물러섰다. 쇼필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다리를 구속하고 있는 마법의 덫을 단검으로 끊었다. 채앵! 맑은 소리를 내며 푸른색의 마력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어? 이거 뭐야?!"

 

깨어진 마법의 파편은 공기 중의 마나와 섞이어 없어진다. 그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마나로 변환되는가 싶더니 다시 푸른색의 빛을 내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덫에 걸려 있던 쇼필드의 다리는 물론, 단검을 쥔 그의 손에도 달라붙더니 순식간에 얼음 속에 가두어버렸다. 지지지직. 얼음은 금방 무릎과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쇼필드는 단검으로 억지로 얼음을 깨려고 했으나, 오히려 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만두어야 했다. 다시 땅바닥에 드러누워 비명을 지르는 쇼필드를 앞에 두고 파이는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역시 카쉬파였군요."

 

요슈아였다. 파이는 그의 말보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것에 더 놀랐다.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오던 요슈아는 파이의 놀란 눈을 보고 쑥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쪽으로 간 건 제가 아니라 마력이 담긴 제 눈꽃이었어요. 저는 마력을 숨기고 근처에서 보고 있었지요."

 

"그럼 이 덫은... 요슈아가 만든 거야?"

 

파이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요슈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분명 전날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그 상냥한 소년이 맞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요슈아는 너무 낯설다. 카쉬파 출신의 소년은 그 시선에서 도망치려는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

 

"이상하잖아요. 추적자가 따라온다기엔 태도가 너무 여유롭고... 느껴지는 마력은 저한테 익숙한 종류였어요. 어비스까지 아니어도, 카쉬파의 조직원이 즐겨 사용하는 마법의 부류인걸요. 아, 파이 씨가 해제 못 한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카쉬파가 쓰는 술식이라 낯설었을 거고... 또, 아파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요슈아는 쇼필드의 단검을 치웠다. 쇼필드에게 걸린 얼음 마법은 이제 허벅지와 어깨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극심한 추위와 고통으로 벌벌 떨던 쇼필드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아냐. 난 카쉬파가 아냐. 그 단검은 내가 도박에서 따낸 거라고...!"

 

"거짓말 하지 마세요. 마법 도구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해제할 수 있지만, 마법을 모르는 사람이 그것만으로 깰 수는 없어요. 카쉬파가 아니면 어디서 카쉬파의 마법을 배웠단 말이에요?"

 

요슈아는 파이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쇼필드를 보았다. 추궁을 받은 쇼필드는 대답이 곤궁한지 잇소리만 내며 몸을 비틀었다. 둘의 모습을 보던 파이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요슈아의 뒤통수를 제대로 가격하였다.

 

"아야! 아아, 파이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이제 그만 괴롭혀. 아파하고 있잖아. 사정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왜 그러는 거야? 상대가 카쉬파라도 이런 방법은 요슈아가 하고 싶은 게 아니잖아?"

 

"그럼 어떻게 해요? 다른 방법이 없는걸요. 저는 케이트 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요슈아를 보며 파이 역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요슈아도 고민이 많구나. 내가 니우 언니처럼 강했다면 진작 털어놨을까? 내가 조금 더 의지할 만했다면 요슈아가 지금 싫어하는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됐을지도...' 파이의 팔이 아래로 처졌다.

 

"...아니야."

 

파이는 고개를 저었다. 요슈아가 기껏 마음의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우울해할 수만은 없다. 그건 요슈아에게도, 요슈아가 믿은 파이 자신에 대해서도 실례다. 파이는 요슈아의 팔을 잡았다. 빙결 마법의 영향 탓에 꽤 차가웠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조금 느릴 뿐이야. 할 수 있어."


 

6. 케이트와의 대화

쇼필드는 아직도 차가운 팔과 다리를 문지르며 카쉬파의 조직원이 맞다고 실토하였다. 하지만 도망쳐 나온 것 또한 사실이라고 했다. 관리하던 노예가 없어졌는데 찾질 못해서 본인이 노예로 끌려갈 뻔했다는 것이다. 파이는 노예라는 단어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요슈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말은 되는 것 같네요. 진실이라는 보증은 없지만요."

 

"좀 믿어 봐. 평생 속고만 살았어?"

 

"사실은 그래요."

 

한 마디로 쇼필드의 입을 다물게 한 요슈아는 그에게서 압수한 단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단검 자체로는 특별한 게 없네요. 누가 마법을 걸어준 거예요?"

 

"엘팅 메모리얼에서 책을 하나 훔쳐 와 달라기에 그때 쓸 만한 걸 내놓으라 했지. 이번에 도망치면서 다 망가지고 마지막 남은 게 아까 그거였어. 쳇, 내 마지막 남은 무기였다고!"

 

쇼필드는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묻는 말에 대답했다. 파이의 눈에는 더없이 부드러운 요슈아의 웃음이 그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던 탓이다. 

연락을 받은 케이트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정령에게 들려주는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아이들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다가오자 어서 오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파이는 왠지 자신의 어린 행동을 모조리 들킨 기분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니 요슈아 역시 켕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렘에서 온 분이 당신이로군요. 환영해요. 저는 센트럴파크의 케이트라고 해요."

 

케이트는 상대가 카쉬파라 하더라도 다른 손님과 똑같이 대했다. 그러면서도 얕잡아 보이는 일 없이 남을 압도하였다. 상대가 불쾌해지는 굴복이 아니라, 저절로 마음을 열고 싶어지는 친화력이었다. 씩씩거리던 쇼필드는 어느새 꼬리를 말고 동그란 코를 긁적였다.

 

"나는 쇼필드인데... 도망쳤거든. 카쉬파였지만 더 있기 힘들어서... 여기서 싸울 생각은 없어."

 

"그러시군요. 잘 오셨어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쇼필드는 눈을 크게 떴다. 짧지 않은 인생을 험하게 굴리며 이렇게 따뜻한 말을 들어본 적은 처음인 것만 같았다. 털려 먹힐 각오를 한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한단 말인가? 오래된 경계심으로 따뜻한 말 뒤의 속셈이 무엇일지 경계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눈앞에 있는 케이트라는 여자는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쇼필드는 어린애들이 보고 있는 것도 잊고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있지. 사실은 내가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



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얻은 쇼필드가 센트럴파크를 떠난 후, 파이는 마법약을 만드는 케이트를 도우며 슬며시 운을 떼었다.

 

"케이트 언니. 궁금한 게 있는데... 언니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무슨 말이니, 파이?"

 

"언니 앞에선 누구나 자기 고민을 털어놓잖아.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거야? 모두가 언니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데."

 

피피는 붉은 마녀를 찾으러 갔고, 요슈아는 바깥에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파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지금 케이트밖에 없다는 사실이 머뭇거리는 마음의 등을 조금 밀어주었다. 덕분에 파이는 금방이라도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나마 고민을 토해놓을 수 있었다. 두꺼운 책을 꺼내던 케이트는 일손을 내려놓고 다가와 고운 손가락으로 파이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나처럼 되고 싶은 거니? 하지만 파이. 모두의 고민을 들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과연 좋은 걸까?"

 

"응?"

 

"아까 그분은 카쉬파였지. 길을 잘못 들어서 고생했다지만, 과거에 사람을 죽였을지도 몰라. 어쩌면 나중에 우리 친구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니는 아까 그 사람을 도와줬잖아."

 

"나는 선택을 한 거야. 혼자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마계에서 누군가의 힘이 되겠다고. 하지만 나라고 모든 사람의 사정을 알 수는 없어. 내가 도와준 사람이 마계의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올바른 일을 한 것일까?"

 

"언니는 거기까지 알 수 없잖아."

 

"그래. 그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최대한 돕는 거야. 그 사람이 선량하다고 믿으면서. 백을 도우면 두셋 정도는 바뀔 수 있다고 믿으면서."

 

파이는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 했으나 곧 입을 다물었다. 

 

요슈아는 카쉬파를 경계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속임수까지 써가며 시험했고, 카쉬파임이 밝혀지자 바로 공격했다. 반면 케이트는 상대가 카쉬파 출신이란 걸 알면서도 도망쳤다는 쇼필드의 말을 믿고 성심껏 도와주었다. 누가 맞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요슈아는 착하고 다정한 소년이며, 케이트는 필요에 따라 단호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응... 난 조금 더 생각해 볼게."


 

7. 한 걸음

다음날. 파이는 홀로 숲속에 있었다.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쥔 채 눈을 감고 심상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마법의 그림자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무언가 잡힐 것 같다. 턱을 타고 흘러 떨어진 땀방울이 풀잎에 부딪히는 소리마저 방해가 되었다. 파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엘레멘탈이 나울나울 춤을 추고 있다. 각 원소들의 춤사위를 주시하며 재빠르게 마력의 응축점을 찾았다. 반짝. 무언가가 빛났다.

 

"...하나, 둘... 셋!"

 

파이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앞에서 연한 초록색으로 빛나던 작은 구가 갑자기 커지더니 다채로운 색으로 바뀌며 공중으로 두둥실 올라갔다. 파이는 눈을 살며시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점점 커지던 빛의 구는 키 큰 나무 위까지 올라가더니 파이의 신호에 맞추어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얼음 조각을 흩뿌렸다. 지팡이를 쥔 작은 손 위로 떨어진 얼음 조각은 따스한 열을 내며 녹았다. 만약 손에 상처가 있다면 나았을 것이다. 대단한 치료는 못 되겠지만 응급처치 정도는 될 것이다.

짝짝짝.

힘찬 박수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요슈아가 거기 서 있었다. 

 

"멋진 마법이네요. 속성을 그렇게 복잡하게 섞은 건 처음 봐요. 파이 씨가 새로 만드신 건가요?"

 

"응... 언제 왔어?"

 

"좀 전에요.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말을 못 걸었어요. 죄송해요."

 

파이는 요슈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두 소년소녀는 커다란 나무의 그늘 아래에 마주 앉았다.

 

"어제 많이 놀라신 거 같아서 사과하러 왔어요. 그리고... 지켜보곤 있었지만 파이 씨를 모르는 사람이랑 둘이 놔두기도 했고..."

 

"...괜찮아. 요슈아는 센트럴파크를 지키려고 그렇게 한 거잖아?"

 

"그렇긴 해도 남을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속인다 하더라도 이쪽 분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죄송해요."

 

"응. 요슈아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사과를 받아들일게. 대신... 앞으로 내 이름 뒤에 '씨'는 붙이지 말아 줄래?"

 

"네? 알겠어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요?"

 

"있지... 나는 바뀌고 싶어." 파이는 지팡이를 인형처럼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막연히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강한 것도 다양한 것 같아. 아직은 어떤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인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밤에 곰곰이 생각했는데..." 파이는 자신 속에서도 잘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말로 엮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준 요슈아 덕분에 단어가 하나씩 떠올랐다.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씩 바뀌어 가려구. 조심조심 움직이며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거든... 물론 마법 공부는 계속 열심히 할 거야. 그래야 더 잘 보일 테니까."

 

파이는 얼굴을 조금 물들인 채 요슈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있지. 나도 니우 언니나 케이트 언니처럼 되고 싶었거든... 사실은 지금도 그래. 하지만 나는 언니들이 아니니까... 내 방식으로 강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니까 요슈아도 카쉬파에서의 일은 잊고... 같이 찾아보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도와줄 테니까..."

 

요슈아에게 마음이 전해졌을까? 파이는 할 수만 있다면 더 말하고 싶었다. 요슈아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고. 언제나 평온해 보여서 자신과 같은 약한 모습은 없을 줄 알았던 요슈아 역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고. 요슈아가 마음의 짐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슬픈 생각에 빠져 계속 허우적거렸을 거라고. 그래서 가르침을 준 요슈아가 자신을 '파이 씨'라고 부르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부끄러웠다. 이미 굉장히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다. 너무 잘난 척한 건 아닐까? 다행히 상냥한 요슈아는 여느 때처럼 웃어주었다.

 

"네. 고마워요. 저도 파이와 함께 노력할게요."

 

긴장하고 있던 파이가 배시시 웃었다.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 케이트의 감화력도 분명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완성되었을 테지. 아직도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함께 노력할 친구가 한 명 더 생겼으니 이 기억을 소중하게...  

 

"나도. 나도 노력할게... 풉."

 

갑자기 들려온 제3 자의 목소리. 파이는 갑자기 물을 맞은 고양이처럼 팔짝 뛰었다. 이건 붉은 마녀의 목소리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높은 목소리로 깔깔거리는 이 웃음은 분명히, 일말의 여지없이, 붉은 마녀의 것이다. 얼굴 전체가 달아오른 파이에 요슈아도 덩달아 뺨을 붉혔다.

 

"아, 죄송해요. 그게... 빨리 사과하고 싶어서 붉은 마녀님께 파이 씨의, 아니, 파이가 있는 곳을 물어보고 온 거라서... 저기, 말할 틈이 없었..."

 

요슈아는 눈물 섞인 지팡이 휘두르기를 피하느라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언니. 왜 그렇게 저기압이에요?"

 

"...몰라."

 

피피에게 괜히 심통을 부려봤자 떠오르는 건 쥐구멍에 숨고 싶은 부끄러움뿐이다. 이제 더는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것 봐. 속성 연습 삼아 한번 만들어 봤어."

 

설명하는 대신, 아까 완성한 마법을 보여주었다. 피피는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이더니 정말 예쁜 마법이라며 파이의 손을 잡고 팔짝거렸다. 평소에는 피피의 이런 활달함이 부담스러웠지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부끄러움을 떨쳐내는 데엔 도움이 되었다. 

 

"파이 언니도 마법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저도 보고 배워야겠네요. 어째 요즘 저만 뒤처지는 거 같아서 걱정이거든요..."

 

'피피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걸까.' 파이는 끝나지 않는 수다를 시작한 피피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피피가 어리다곤 해도 나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니까... 생각해 보면 나도 예전부터 고민이 많았어. 그럼 니우 언니도 비슷한 고민을 했으려나?' 어릴 때부터 보아온 니우는 강하고 친절하며 의지가 되는 언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니우라고 고민거리 한둘 없을 리가 없다. 카쉬파나 마계에 대한 고민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파이나 피피가 하는 것처럼 작고, 어쩌면 한심해 보이는 고민들.

 

'그러고 보면 니우 언니도 전에 치마가 안 어울린다고 투덜거렸지...'

 

그렇게 어색한 것도 아니었는데.

안심이 된다.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약하고, 모르는 것도 많고, 어떤 길을 선택할지 결정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고민이 평생 따라오며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왠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 같다. 지금껏 움츠리기만 했지만, 직접 보고 느끼며 고민하여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가고 싶다. 그러면 언젠가는 분명히 센트럴파크의 가족이 자신을 의지해 줄 것이다. 고향에 있는 엄마에게도 자랑스러운 딸로서 돌아갈 수 있겠지. 파이는 얼른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붉은 마녀가 입막음으로 요구한 장미 코르사주의 마무리를 끝냈다.

 

"얘들아. 니우가 돌아온다고 하는구나. 빵 만드는 걸 도와주겠니?"

 

"응!"

 

파이는 피피와 함께 케이트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