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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수백의 얼굴을 가졌으나 보이지 않는자 - 무형의 시로코(시로코의 환영)


너는 살고자 한다.
길어진 갈증에 혀는 버썩 말라가고 두 눈이 씀벅인다. 분통이 터져 발을 굴러도 마른 가지처럼 버석한 것은 힘이 없다.
너는 차라리 '마계'를 그린다. 썩 성에 차지 않는 양의 에너지를 삼킬 때, 들썩이는 너의 등에서 나던 쇳소리를 생각한다.
누군가 실수로 쏟아놓은 적막이 갈라진 땅 위, 해무가 되어 깔리면 조용히 뒤척이는 기척에도 떨던 놈들을 생각한다.
감흥없이 지나간 얼굴들을 생각한다. 젖은 낙엽처럼 들러붙던 '사도'란 이름을 생각한다. 이윽고, 그 얼굴을 떠올린다.
너는 화를 참아내지 못한다. 괴성을 지른다.
혀뿌리에 비릿한 쇠맛이 돈다.
 
향기에 반응한 벌레들이 움직인다. 차올랐던 너의 숨이 천천히 잦아든다.
너는 살고자 한다.
몇 번을 찢어 죽여도 악착같이 돋아나는 멍청한 미물들에 당할 수 없다. 오늘에야말로 놈들의 씨를 말려주리라고, 너는 생각한다.
귀를 기울인다. 굴 속을 헤매는 발소리가 여럿이다. 너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는다. 아니, 흩어진다. 연기가 되어 동굴 천정을 쓸어내린다.
빛줄기 하나도 허락치 않는 매정한 허공. 너는 손톱으로 돌벽을 버걱버걱 긁는다. 견디지 못한 손톱이 젖혀지면, 살갗을 찌른다. 파고든다.
너는 오늘 네가 죽을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너는 살고자 한다. 정신이 담길 그릇을 찾아 오래 떠돈다. 오래, 더 오래 떠돌며
너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되찾으리라. 홀로 받은 것을 되갚으리라.
무(無)가 되었으니 형(形)이 되리라. 모든 시간에 존재하리라.
문득 처지가 서러워질때면 너는 다시 그 얼굴을 떠올린다.
'사도는 사도를 죽일 수 없다.' 그말이 네게는 꿈과도 같다. 차라리 죽여달라 울며 비는 얼굴을 상상하고, 상상하고, 상상하며 버틴
너는 마침내 일곱을 본다.
 
부활!
너는 비로소 이룰 것이다. 그 어떤 난관도 너에겐 여흥일 뿐.
거대한 폭풍으로 일어나리라. 넘치는 힘을 풀어 헤치며, 폭발하며, 터뜨리고 솟구치고 휘두르며
깨어날 것이다! 겁을 집어먹은 놈들의 눈동자에 너의 위용을 심어주고
몰아칠 것이다! 이 세계의 척추를 타고 올라 그리던 오아시스에 다다르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마시리라!
바다 밑 하늘에까지 너의 뿌리를 내리라!
 
한때 너는 살고자 했다. 그러나 보다 원하는 것이 생겼다.
꽃향기를 맡은 벌레들이 줄기를 기어오르며 너를 오래 간질인다. 그 바람에 너는, 너조차 모르는 순간에 너는
슬픈 미소를 짓는다.

 

 

무아의 시로코 - 레베체
기억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눕는다.
금세 더운 에너지가 발가락 새를 채우고 든다.
쭈욱, 꿈결 안으로 다리를 뻗어내면 그는 곧 뿌리가 되어
별이 품은 힘을 여한없이 삼키어 낸다. 벌떡이는 혈관. 깨어나는 감각.
목젖을 태우던 갈증이 가시고 나면, 보다 느긋해지리라.
두 팔을 땅 깊숙이 박아넣고 가지를 내리라. 더 멀리, 안으로, 안으로…
마침내 닿으리라. 안개처럼 자욱한, 입안처럼 뜨뜻한 별의 숨통. 별의 부아.
그안에 몸을 풀어 놓으면, 그래, 나조차 나를 잊고 누리던 곳에서
나는 비로소 '만개'하리라!
 
찬바람이 등허리를 베어 물고 난다.
그 바람에 선잠을 깬다.
살갗에 닿는 땅이 얼어붙은 듯 차다. 꿈은 사라졌고, 기억은 흩어졌다.
긴 한숨이 과거의 조각을 뒤섞고 만다.
무릎을 곧추세우고 얼굴을 묻는다.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의 저편, 내가 있던 곳.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꿈을 꾸리라.
변이의 세계, 주알라바돈을.
 
 
무념의 시로코 - 레스테
흩어졌던 사념 속에서 너희를 보았다.
죽고, 죽이고, 탐하고, 빼앗고, 욕망하고, 또 욕망하고…
삶에 대한 집착이, 힘에 대한 갈망이 한낱 부스러기 같던 나의 사념을 부풀려
나의 아이들이라 불리기엔 너무도 추접하게 일그러뜨린 것을 보았다.
 
순진한 너희들은 그저 계획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을 베고 찌르고 살육하며 얻은 힘으로 아량을 베풀듯 세계를 구한다는 너희를,
영웅 행세에 취해 악행을 벌이면서도 나를 가리켜 불의라 하는 너희를 보고 나니
참 많은 것이 쉬워졌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꿰메어 깁느라 누더기가 되어가는 판은 몰랐겠지.
살려둔 자만이 건넬 수 있는 감사에 적잖이 우쭐대며 기뻐했겠지.
두렵지 않았겠지. 이미 몇 명의 사도를 상대한 몸이니.
내심 기대도 했을 것이다. 다음, 그리고 다음을.
그러니 말은 바로 해야지.
너희들은 정의가 아니다. 살의(殺意)다.
이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와 다를 것 없는 괴물.
 
너희에게 별 감정은 없다.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것도 거기까지.
그러니 오해는 말기를. 내가 너희를 죽이는 것은 그냥…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의 시로코 - 길리
일곱의 그릇으로부터 사도가 나니 모든 일의 시작이 그러함이라
사도가 몸을 이룬 일곱을 보니 그간의 일들이 생생히 떠오르매 사도가 그들의 혼에 대고 이르길
너희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내리고자 하니 각자 생에 저지른 죄악을 고하라 내가 그것을 집어 삼켜 힘에 쓰리라
죽음 곁에서 생을 일군 이가 이를 듣고 나서서 가로되 저의 죄악은 이러하나이다
뒤늦게 깨달았나이다 반드시 예언을 가르고자 하였으나 저의 아둔함으로 계획의 일부가 되었나이다 하니
사도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며 이르되 내가 원하노니 지혜를 가지라 하니 즉시 그의 머리만 남더라
죽음의 고랑을 채운 이가 이를 보고 나서매 저는 무엇도 지키지 못했나이다
먼 과거 뜻을 함께한 동료들이 죽어 나갈 때 홀로 살아남았나이다 딸처럼 아끼던 아이마저 제손으로 거두었나이다 하니
사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르되 내가 원하노니 지킬 힘을 가지라 하니 즉시 그의 이마에서 뿔이 돋더라
땅을 헤집어 죽음을 쥔 이가 서둘러 나서 고하니 저는 친우의 손에 죽었나이다 그의 눈에 거짓을 담아 피를 흘리게 하고 두손마저 설움으로 적셨나이다 하니
사도가 고심하여 이르되 내가 원하노니 자유를 잃을지어다 하니 즉시 그의 배에서 집이 나더라
죄악을 고하는 소리는 이후에도 이어졌으니 사도가 흡족해하며 그들의 업을 삼키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이 새긴 이만은 나서지 않더라
사도가 괘씸하여 이르길 너는 어찌하여 입을 열지 않고 있느냐 너는 진실로 저지른 죄악이 없는 것이냐 하니
죽음이 새긴 이가 답하길 죄악이 있다면 너희 사도에게 있느니라
사도가 듣고 너는 두렵지 않으냐 하니 죽음이 새긴 이가 답하여 말하길 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내가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느니라
마침내 사도가 일어나 모두의 앞에 명하니 오냐 고할 것이 없는 자는 영영 고하지 못하리라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숨어 살리라 숨어서 무언의 곡을 하다 제풀에 지쳐 죽으리라
사도가 무리를 흩어 보내고 성에 오르니 거기서 남은 일을 행하게 되리라
 
 
게이트
"저곳에 원래 저런 문이 있었나요?"
줄곧 하늘성 입구를 통제해 온 제국의 군인들은 새삼스레 닫힌 '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타오르는 자색의 불꽃, 그 빛에 어슴푸레 드러난 '문'의 윤곽은
먼 옛날 하늘성의 주인이었다는 어느 사도의 위엄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기록 속의 사도는 죽었고, 문 너머에 웅숭그린 또 하나의 사도 역시 제국의 칼날에 숨을 거둘 테니까.
하지만…
"일단 황녀님께 보고하지."
제국에 대한 충성심보단 살고자 하는 본능을 따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문을 향해 등을 보인 그 순간, 성급한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땅을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문'이 눈을 뜨고 말았다.
 
"누가 감히 하늘성을 침범하는가!"
 
 
백수왕 운조
하늘성을 타고 오르는 강자들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절망의 탑에서 느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전율이 척추를 따라 뻗어내린다.
사도 시로코의 힘을 받아들이고 난 뒤, 나는 달라졌다.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 팽팽하게 당겨진 두 다리의 힘줄.
벌떡이는 심장. 가쁘게 따르는 숨. 전신을 휘도는 피.
그리고 본능.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은 수련의 장이 아니다. 사냥할 먹이다.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원하는 현무가 낮은 소리로 굶주림을 토할 때마다,
그 시선이 나의 목덜미에 송곳니처럼 박혀 올 때마다
나는 되새긴다.
힘! 오직 백수(百獸)를 찢어 발길 힘을 가진 자만이 그들의 `왕'으로써 군림할 수 있음을!
오거라. 너희의 시체를 현무의 먹이로 던져주고 되살아난 사도를 지켜내리라!
맹수의 포효와 뒤섞이는 비명 속에 예언은 반드시 빗나갈 것이다!
 
"하하하! 그러니 조금만 버티라고. 멋진 걸 보여 줄 테니."
 
 
떠도는 구루미
저는 지금 하늘성에 와 있습니다.
흩어진 사도의 에너지를 끌어모으기 위한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서지요.
일은 녹록지 않습니다. 사도를 잡겠다고 혈안이 돼있는 연합군도 연합군이지만,
진짜 제 속을 썩이는 골칫덩이는 따로 있거든요.
 
그 녀석을 처음 본 건 하늘성 4층 제일 끝방에서였습니다.
그 방 마법진이 자꾸 망가지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기둥 뒤에 숨어 동태를 살피던 중이었죠.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범인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뭉게뭉게 떠도는 보랏빛 에너지 덩어리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름인 줄 알 겁니다.
사도로부터 떨어져 나온 녀석인 것 같은데, 도통 말은 안 들어먹고 마법진에 머리를 박아대니
그 녀석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도 제 일이 돼 버렸습니다.
특별한 생각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왜 자꾸 하늘성 밖으로 나가려는 걸까요?
뭐, 어차피 사도가 힘을 되찾으면 녀석도 사라질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겠죠.
아, 그나저나 거기는 어떻습니까? 솔도로스 님은 마계에 잘 도착하셨습니까?
 
ㅡ 절망에서 내려온 그림시커의 편지 중에서

 
 
터뜨리는 트라, 흡수하는 타나
타나, 저기 봐. 누가 왔어.
누구지? 처음 보는데. 만약 인간이라면…
뭐 어때! 재밌을 것 같은데. 가서 같이 놀자!
그치만… 분명 싫어할 거야.
누가?
알잖아.
잠깐은 괜찮아.
그때처럼 또 산산조각 나면 어떡해?
그럴 일 없게 우리가 저들을 붙잡아 놓는 거야.
꽃에 가까이 갈 수 없게?
꽃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트라, 저들을 믿는 건 아니지?
허튼짓을 하면 터뜨려버릴 테니 걱정 마.
그거라면 언제든 내가 도와줄게.
좋아, 그럼 정한 거다? 트라몬타나 전~진!
잠깐만. 조심 해. 같이 가!
 
 
마탄 6 레이나
그분이 향하는 길이 진리이고 진실이리라.
그분은 절망 속에 유일하게 빛을 뿜던 질서였으며, 모두가 바라는 염원과 같다.
그 염원이 답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이 한 몸 기꺼이 그의 탄환이 되어 산화할 것이니.
다짐은 신념이 되고, 망설임 없이 심연 속에 몸을 내던지리라.
이따금 심연 속 달콤한 뱀의 속삭임이 내면을 어지럽히지만,
상관없다. 그로써 한 걸음의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뱀의 혀에 놀아날 것이오, 맹수의 발톱이 되어 그분의 발자취를 지킬 것이다.
 
심연을 담은 탄환이 어둠을 가르고 헤매이는 자들의 심장을 꿰뚫는다.
죄책감은 발목을 잡는 덫일 뿐이니, 오직 그가 찾는 진리만을 쫓을 것이며
방아쇠를 당김에 한 치의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찾아 분쇄하는 나의 탄환은 그분의 칼날이며 세상을 가르는 함성이 되리니.
 
부디 이 방아쇠가 솔도로스님의 길을 밝히는 신호탄이 되기를…
 
 
잔훼의 로도스
금빛의 육체를 앗아간 힘은 걸을 수 있는 다리를 내게 주었다.
자유의 의지를 구속한 힘은 휘두를 수 있는 무기를 내게 주었다.
하늘의 성을 점거한 힘은 움직일 수 있는 마력을 내게 주었다.
 
그러나 진정 나를 눈뜨게 한 `힘`, 그 힘은 붉었던 나의 심장에 있다.
분노. 설움. 원망. 증오.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단단한 응어리로 빈 곳을 채운다.
성의 힘이 사라지고 허기를 채우지 못한 나는 껍데기가 되어 무력해졌으나
이제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이 때를 맞아 장대한 갑주가 되었으니
 
파괴한다.
성의 침입자여.
나를 얕본 나날들을 후회하게 해 주마.
 
 
매혹의 하니에르
어서 와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나를 봐요. 보고 싶었잖아.
환영의 경계를 넘어설 때부터 코끝을 간질이던 달콤한 향,
그 주인이 누군지 내내 궁금했잖아.
솔직해져요. 알고 싶은 게 정말 그것뿐이에요?
하고 싶은 게 정말 그것뿐인가요?
 
내 정체가 궁금하다면 이리 와 함께 춤을 춰요.
허공을 휘젓고 폭발하는 환희를 느껴봐요.
더 많이 원해도 괜찮아요. 줄 수 있으니까.
당신이 찾는 그녀는 이곳에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꿈이 아니에요.
하지만 바란다면 모두 꿈으로 만들어줄게요.
자, 모든 것을 잊고 나와 머물러요.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몽환의 새벽에서.
 
 
먹어 치우는 거스티
아!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구루미 녀석을 잡으러 갔다가 더 어마어마한 놈을 만났지 뭡니까!
아, 구루미는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린 그 녀석한테 제가 붙여준 이름입니다.
둥글게 뭉친 에너지 덩어리가 꼭 구름을…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이번에 만난 놈은 아주 악랄합니다.
평소에는 구루미와 비슷한 모양새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먹잇감이 다가오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지요.
쩍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뻗어 나온 놈의 본체를 마주했을 땐, 그 압도적인 공포에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
겨우 도망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통째로 잡아먹혀 놈의 에너지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떨어져 나온 기운에서도 저런 괴물들이 태어난다니. 새삼스럽지만 사도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마계는 그런 사도들이 우글우글 모여 살던 곳이 아닙니까.
아참. 그러고 보니 벌써 사도 하나를 만났다면서요?
그게 누굽니까?
 
ㅡ 절망에서 내려온 그림시커의 편지 중에서
 
 
시로코의 악몽
아니, 그럴 리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 부서진 행성의 조각에서 비루하게 망가졌을 리 없다.
입속에 칼을 숨긴 계집에게 당해 차가운 땅굴 어딘가에 내던져졌을 리 없다.
하찮은 인간들에게 당했을 리 없다. 흩어졌을 리 없다.
아아. 원통함이란 바늘을 삼키는 듯하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지나버린 이야깃거리로 부풀려지고 일그러지다니.
사정없이 찢겨 형체조차 없이 부연 먼지처럼 떠돌았다니.
그럴 리 없다. 내가 그럴 리 없어.
그건 내가 아니다.
꿈이다!
그래, 분명 꿈이다.
한밤의 불청객. 어둠보다 짙은 어둠. 눈꺼풀 안에서나 보이는 세계. 얼기설기 엮인 순간의 왜곡. 모순. 거짓!
 
섣불리 내 안에 발을 들인 자여. 와서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라.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진짜 나의 모습을.
 
 
꿈 속의 올드 해그
쉬. 아가.
악몽을 무르고 여기 와 잠들거라.
두려워 말거라.
내가 보고 있으니.
 
여기는 만들어진 무형의 세계.
발버둥 칠수록 옭아매는 정교한 그물.
아가. 여기 그녀가 있단다.
네가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토하고 무의미한 저항을 반복하며 서서히, 아주 서서히
힘을 다할 때까지
그저 즐거이 지켜보고 있단다.
 
쉬. 눈을 감으렴. 너를 대신해 내가 울어주마.
눈물로써 너를 따르는 비극의 행렬을 끊으마.
그러니 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저 소리를 듣거라.
너를 위해 준비한 영원의 안식.
그래, `죽음`이 오고 있단다.
 
 
록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냄새. 이 기운. 검의 녹과 뒤섞인 찐득한 핏방울. 그 비린내.
기특하구나. 아직 죽지 않았다니.
그 짧은 사이, 하찮은 목숨을 내버렸다면 어딘가에 처박힌 네 시체라도 찾으려 했다.
썩다 남은 살점을 모조리 짓이기고, 뼈까지 조각 내어 네 후손에 먹이려 했다.
그런데 네 발로 직접 찾아와주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덕분에 수고를 덜었으니 선물을 주마.
그날, 그때. 네가 두고간 것이 있지.
네깟 놈 하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계집을 너는 버리고도 잊어버렸지.
보아라! 네놈이 역한 생을 꾸역 꾸역 살아내는 동안 죽음조차 온전히 맞지 못해 고통받고, 고통받고, 고통받아온 계집의 모습을!
아아. 가엾기도 하지.
어딘지도 모를 곳에 혼이 붙들려 끝 모르는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 제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 하는 머저리 때문이라니.
 
네 손으로 끝낼 기회를 주마. 나를 향해 휘둘렀던 건방진 칼날로 계집의 심장을 찔러보거라.
못하겠다면, 대신 네 것을 내놓아도 좋다. 계집의 손에 네 심장을 들려보내면 계집의 혼을 기꺼이 놓아주마.
자, 어서 선택하거라.
나의 자비가 허락하는 시간은 길지 않으니.
 
 
이름을 잊은 수문장

가려진 심연의 안갯속, 목소리를 들었다.
켜켜이 묻힌 기억의 덮개 아래 잠들어 있던 그를 깨우는 목소리.
 
그분이 나를 다시 부르시는구나.
전장의 화신이며 겁화의 상징이자 용족의 왕이신 나의 주군.
그분이 나를 다시 찾으셨구나.
터질 것 같이 휘몰아치는 이 광활한 에너지, 그분임이 틀림없구나.
헌데, 어째서 안개에 가리어진 듯 그분의 형상이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가.
어째서 그분의 목소리가 물 위에 번지듯 흐릿하게 들리는가.
 
'지켜라...'
그래, 나는 하늘성을 지키던 자...
'지켜라...'
나는 소임을 마치려는 자.
모든 소임을 끝마치고 그분의 의지가 지상과 하늘에 닿을 때,
그때, 비로소 온전한 자리로 회귀하리라.
 
그대, 하늘성을 찾은 자여.
내 육신과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소멸하기 전까지, 감히 하늘성 위를 올려다보지 말지어다.
 
 
안개 속의 암살자
분명 내 사지는 시로코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비명굴에 헛되이 목숨을 내던진 자신을 한탄하며 허망한 운명을 원망했다.
하지만 눈을 뜬 내 앞은 세간의 사람들이 떠들던 천국의 형상도, 지옥의 형상도 아니었다.
아니다, 끝없이 펼쳐진 무의 어둠… 이곳이 지옥이려나?
 
어쩌면 나는 아직도 비명굴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보다 더욱 짙어진 어둠과 침묵을 가르며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다
쉼 없이 걷고, 베다 보면 끝에 도달하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헤매고, 헤매이며 끝없는 어둠 속을 벗어나고자 허덕였다.
심해와 같은 어둠 속에서 아군은 없다. 철저히 혼자일 뿐.
서서히 잠식해오는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정신마저 탁하게 흐트러뜨린다.
 
이제는 어디까지의 기억이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공격해오는 것은 베었고, 다가오는 것조차 베었다.
서늘한 심연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공의의 넥스 & 자비의 비타
나는 심연 속 피어난 요동치는 '생(生)'이라.
나는 심연 속 사그라지는 절망하는 '사(死)'이라.
 
나는 무형의 공간에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주관자이자,
이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자이니.
하나와 같으나, 함께 할 수 없으며.
하나에서 탄생했으나, 빛과 어둠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이라.
무형의 하늘을 향하려는 자는 삶과 죽음의 저울 앞에 선택할지니.
 
무형을 헤매는 자들이여, 삶 속에 고뇌하라.
삶이야말로 영원한 심연 속을 헤매는 고통의 형벌일지니.
감히 하늘에 닿으려는 자들이여, 죽음으로 단죄하라.
죽음의 형벌이야말로 너희를 절망케 하는 마지막 결말일 테니.
너희는 삶과 죽음의 형벌 앞에 자만을 벗고 고뇌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