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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GEON&FIGHTER

던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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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서해로 넘어가고 겐트에도 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일반 가정집을 밝히는 전깃불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치였지만 안톤 토벌 후 파워스테이션이 조금씩 돌아가면서 복구가 이루어진 덕분이다. 하지만 아직 정상 복구된 것은 아니기에 꼭 필요한 곳에만 불을 켰다. 그래서 밤의 겐트는 휘황찬란한 불야성이 아니라 어둠에 잠긴 고요한 시골 마을 같았다.

 

돌아온 김에 영양제나 맞고 가라는 세레나의 성화에 의무실 침대에 누워있던 운은 바깥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침대의 커튼이 젖혀지며 베레모를 쓴 다부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숱한 전장을 겪었는지 단정한 용모에 어울리지 않는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황녀의 정원 소속, 라이니입니다. 겐트 사령부의 운 라이오닐 대령 본인 맞으십니까? 지금 즉시 입궐하라는 황녀님의 명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말없이 일어나 라이니와 함께 궁궐로 향했다. 뻥 뚫린 큰길을 걷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약간 뒤처진 채 오른팔을 주무르며 따라가던 운은 멀리 보이는 황실 무기고의 경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곳은 황녀의 정원이 경비하는 곳 아닙니까?" 

 

잠시 멈춰 운이 가리키는 곳을 본 라이니는 다시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저희 인원이 모자라서 겐트 수비대의 협조를 받고 있습니다." 

 

'궁궐도 모자라 무기고의 경비까지 수비대에게 맡긴다고?'

 

운은 갸웃거렸다. 젤딘 슈나이더가 이끄는 겐트 수비대는 평소에 치안 유지만으로도 바쁠 터이다. 아무리 겐트 사령부가 범위를 넓혀 수비대를 지원한다고 해도 이쪽은 인원이 상당히 모자란다. 수비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년병을 동원하는 등의 대대적인 보충은 웨스피스 사령부에서만 진행하고 있다.

 

"수비대원도 부족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대장군님이 귀족의 사병을 끌고 안톤과 싸우셨잖습니까. 그때 생각이 바뀐 사병들 일부가 수비대에 합류했습니다. 사령부에는 그런 경우가 없나요?"

 

잭터가 천계군의 최정점에 있기는 하지만 특수 부대에 속하는 겐트 수비대나 황녀의 정원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모두 알지는 못한다. 전쟁 중에야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급한 상황과 잭터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금은 원래의 독립적인 행정 체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운은 몇 가지 더 물어보았으나 라이니는 짤막하게 대답할 뿐 만족스레 정보를 주지 않았다. 수비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황녀의 정원이지만 아무래도 타 부대의 일을 그에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 왔습니다. 무장은 해제해 주십시오."

 

라이니가 운을 안내한 곳은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 아니라 좀 더 깊은, 황녀가 거처하는 황녀궁이었다.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어울리는 곳으로, 무법지대 출신자들은 감히 들어갈 꿈도 꾸지 못하는 곳이다. 감동보다는 여긴 내가 올 곳이 아니라는 불편함이 온몸을 짓눌렀다. 운은 부를 사람을 착각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황녀의 개인 서재로 들어갔다.

 

"잘 와주었네."

 

두 무릎을 꿇고 고두하자 황녀가 어서 일어나라 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문을 닫고 나가는 라이니와 함께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선객이 있었다. 황녀 앞에서 대담하게도 곰방대를 물고 있는 메릴과 안쓰러울 정도로 긴장하여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는 나엔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운을 본 황녀가 웃으며, 그러나 살짝 엄한 말투로 말했다.

 

"라이오닐 대령. 자네가 나엔 박사에게 실례를 저질렀다며? 자네의 말에 상처를 받은 나엔 박사가 연구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군. 그녀가 파워스테이션 복구를 도우러 가게 되었으니, 의욕이 없어지는 건 큰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박사에게 사과를 좀 해줘야겠어."

 

"어제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운은 바로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딱딱하게 앉아 있던 나엔은 몹시 부담스러워하며 두 팔로 'X' 표시를 만들어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려 애썼다. 메릴은 곰방대를 씹으며 낄낄거렸다.

 

"잘됐네. 이제 싸우지 마라."

 

"내, 내가 언제 우, 운하고 싸웠다고 그러, 는 거야. 난 벼, 별로 사과 같은 거... 메릴이...!"

 

"이런. 그렇게 말하면 짐이 무안하지 않은가, 박사. 박사는 이 나라의 중요한 인재이니 먼 길 떠나기 전에 이렇게나마 챙겨주고 싶어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운은 입을 다문 채 세 여자의 대화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엔은 필사적으로 자기가 이른 거 아니라며 전하려 하였으나, 메릴과 황녀는 '사과는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아주는 것도 중요'라는 논리 하에 그만 내빼고 용서해 주라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기절할 듯한 나엔이 차를 허겁지겁 마시는 걸 흐뭇이 보던 황녀가 운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운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고 시키는 대로 앉았다.

 

"제게 용건이 더 있으십니까?"

 

"있고말고. 갑자기 사과를 강요해 불쾌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미안하네.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남의 눈이 두려워 이런 핑계를 대어 부르고 말았군."

 

사과와 그간의 치하, 그리고 상처에 대한 염려를 한 후에 천계의 황녀 에르제가 본론을 꺼내었다.

 

"메릴 박사의 말씀으로는 죽은 자의 성에는 각종 신비로운 이기가 가득하다더군. 더구나 마계엔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들이 강한 힘을 뽐내며 그들의 사회를 이루고 있다 들었네. 그곳을 알기 위하여 제국의 황녀는 본인이 직접 탐사에 참여했고 말이야. 그만큼 제국에서도 마계를 중요히 보고 있다는 뜻일세. 마계에서 구한 테라나이트라는 광물을 제국으로 가져가기도 했고."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운은 황녀가 이렇게 긴 뜸을 들이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저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국에게 마계는 반드시 천계를 통하여 가야 하는 곳일세. 우리는 그들과 동맹을 맺고 길을 제공하고 있으나, 점점 방자해지는 그들은 입장을 잊은 듯하네. 허나 제국으로 인한 각종 유익에 빠진 귀족들은 제국을 그저 질 좋은 금맥으로만 생각한다네. 가난한 백성이 소비하지 못하는 귀족의 생산품이 제국에 비싸게 팔려가고 있지. 또한, 제국의 사치품을 사들여 재력을 과시하는 것이 귀족가의 유행이야. 귀족에게 있어 제국은 결코 놓칠 수 없는 파트너일세." 

 

에르제가 운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공손히 받아들며 황녀의 안색을 살피니 몹시 어두웠다. 아까의 밝은 웃음이 거짓말 같았다. 

 

"귀족만이 아니야. 백성들도 제국을 좋게 보고 있어. 복구를 돕고 물건을 사가는데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짐은 제국을 대체할 상대로 흑요정과 교역을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낯선 우리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모양일세. 제국과 동맹을 맺은 것도 그들의 심기에 어긋나는 듯하고. " 

 

"그렇습니까." 

 

"제국, 아랫세계... 우리가 대처하기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네. 그들이 황녀까지 보내어 우리를 필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연구해야 하네. 그러니 라이오닐 대령. 그대가 사절단의 책임자가 되어 아랫세계를 공부하고 와주지 않겠는가?" 

 

운은 숨이 턱 막혔다. 

 

"왜 저입니까?" 

 

"자네는 명성이 있어 사절로 적당하고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속도도 빠르지. 안톤과 싸울 때도 나엔 박사의 조수 역할까지 했다고 들었네." 

 

"담당자가 죽어 도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연구 내용을 알아야 사령관님께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어이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여 돕지 않았는가. 자네가 뛰어난 인재임은 이미 알고 있으니 겸손의 말을 거두게." 

 

운은 낯가림이 심한 나엔이 중구난방으로 던지는 말을 필사적으로 받아 적던 때를 떠올렸다. 하나라도 더 알아듣기 위해 전투에 나가서도 책을 뒤적이긴 했지만, 글쎄. 억지로 집어넣은 지식이 완전히 소화되었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물론 평소에도 책을 짬짬이 읽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한 몸부림일 뿐이다. 자신에게 중임을 맡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알지 못하는 지식에 대한 탐구심도 없다. 아버지에게 맞아가며 사냥 기술을 익혔던 것처럼 그저 해야 하니까 했을 뿐이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녀는 실망한 듯했지만 더 강요하지 않았다. 서재는 조용해졌고 나엔이 차를 홀짝이는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에 시선을 고정시킨 운은 황녀가 이만 물러가라고 말해 주길 기다렸다. 

 

'여긴 나 따위가 있어도 될 곳이 아니야.' 하지만 황녀의 용건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겠네. 그럼 군사전문가로서 자네가 본 해안수비대의 상황과 전력을 평가해주게." 

 

안도했다.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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