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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GEON&FIGHTER

던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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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마치고 잔뜩 성이 난 잭터를 사령부로 모신 후 전사한 부하의 유품을 챙겨 나왔다. 부하의 집은 시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한때 젓갈을 팔았다던 낡은 집은 딸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부모의 슬픔에 짓눌려 더욱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살릴 수도 있었는데.' 무너지려는 허리를 꼿꼿이 세워 문을 두들겼다. 시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지만, 운의 노력 덕분에 유품이라도 뒤늦게 찾은 참이었다. 그동안 빼빼 말라버린 부모는 아들의 수첩을 보자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사양하는 운을 기어이 붙잡아 자식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대령님은 왜 그렇게 말랐소? 좀 더 살이 붙어야 여자들이 좋아하지."

 

"우린 안 믿어. 대장군님이 일부러 안톤과의 싸움을 질질 끌었다는 이야기, 우린 안 믿어. 애들이 그분 칭찬을 얼마나 했는데. 나도 멀리서 뵌 적 있지. 아주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왔어."

 

부모는 계속 운의 손을 쓰다듬으며 이거 먹으라는 둥, 저거 싸주겠다는 둥, 끝없이 챙기려 들었다. 친구 집보다 부하의 집에 찾아간 경험이 더 많지만 운은 아직도 이런 일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어떻게든 사양하려 들었고, 꾸지람을 듣고서야 푸짐한 음식을 몇 개의 가방에 나눠 담은 채로 집에서 나왔다. 

 

"......"

 

이대로 사령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벌써 사령부 사람들이 퇴근을 서두를 무렵이니까. 괜히 그들을 붙잡아 귀가 시간을 늦추고 싶지 않았다. 운은 점점 무거워지는 가방을 든 채 해가 지는 거리를 걸었다. 집에 가져가도 보관할 곳이 없다. 그렇다고 혼자 먹기엔 너무 양이 많다. 버릴 수도 없고 난감한 노릇이었다. 만약 그 모험가가 있다면 같이 먹어주었으려나 하는 생각을 할 때쯤,

 

"이런. 운 군이 아닌가. 뭐 하고 있나?"

 

절대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도움의 손길을 뻗어왔다.

 

 

잔을 가득 채운 술은 춤추는 촛불을 머금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밤에는 이렇게 하는 거라는 집주인의 배려 덕분에 처음 겪는 풍취였다. 하지만 운의 머리를 꽉 채운 것은 이 엄청난 귀족 가문의 저녁 시간이 과연 30분 안에 끝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래서야 조용한 뜰 가운데 있는 정자의 처마가 멋들어지게 휘었건 어쨌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런 진수성찬에 술이 어울릴지 모르겠군. 천계 영웅의 부모가 만들어 준 음식이라니. 자네 덕분에 호식하는군."

 

"좋은 술 감사합니다."

 

예의상 첫 잔을 비운 후 수저를 들었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배고프지 않았다. 애초에 계속된 철야로 음식에 맛을 잃은 상태다. 따끈하게 데워져 나온 부하의 집 요리가 버려지지 않는 것에 만족하며 운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에를록스 님은 자네를 많이 신뢰하고 계신 것 같더군. 바쁘실 텐데 자네 덕분에 든든하시겠어."

 

"아직 모자랍니다."

 

"오늘 점심 신문을 봤다네.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더군. 다시 봐도 참 대단해.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많이 애썼군."

 

운은 갑자기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자신도 이유를 몰랐다. 내심 갸웃거리며 유르겐의 말에 답했다.

 

"저 정도는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사실 지금도 자네의 공에 비하면 대령이라는 지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전에 말이 나왔던 준장도 좀 모자란다고 생각했는데, 왜 거절했는가?"

 

"지금도 제 분수에 넘치기 때문입니다."

 

"분수라니. 그 나이에 지나치게 겸손한 거 아닌가? 내가 자네 나이 땐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지. 남자라고 비웃는 여자들 사이에서 아버지 이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겠다며 자신감에 차 있었네. 실제로 그리했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보편적으로 여성이 많은 권력을 가지는 천계에서 네빌로 유르겐의 두각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체력을 중시하는 군대에서나 남성이 여성과 비슷한 대우를 받지, 다른 분야, 특히 정치권은 남성에게 있어 유리 천장이나 마찬가지다.

 

유르겐 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던 운은 유르겐이 황녀와 잭터가 참석한 오늘 회의에 불참했다는 사실 역시 떠올렸다. '그 중요한 회의에 이 사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다른 대귀족들의 밀어내기 때문인가. 귀족 내부에서도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뜻인가.' 운의 생각을 눈치챈 유르겐이 하하, 사람 좋게 웃었다.

 

"엉뚱한 걱정하지 말게. 내 딸이 혼인도 하고 나이도 되지 않았는가? 슬슬 가문을 이을 준비를 해야 하니 오늘은 빠진 걸세."

 

40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유르겐은 귀족답게 일찍 결혼하여 자식을 넷이나 두고 있다. 그중 두 명은 운보다 연상이며, 유르겐이 말하는 딸은 첫째이자 고명딸인 마리안 유르겐이다. '얼마 전에 무법지대로 간다더니 벌써 돌아온 건가.' 운은 잭터를 수행하며 마리안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난민들을 도우러 무법지대에 간다던 것도 그저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일 터이다. 

 

"게다가 젤바에서 내내 긴장한 탓인지 몸이 피로하여 긴 회의를 견딜 자신도 없고. 좀 쉬었다가 다시 갈 준비를 해야지."

 

"다시 젤바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마계로 통하는 길을 닫지 못하니 경비 문제가 생기지 않나? 해안수비대와 협력하여 여러 방도를 강구할 생각일세."

 

"그렇습니까."

 

공손하지만 짧게 대답하는 운을 바라보던 유르겐이 씨익 웃었다.

 

"자넨 아직도 어리군. 어른과 이야기하는 게 불편한가?"

 

"불쾌하시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즐거운 대화에 소질이 없습니다."

 

"아니, 군인답고 괜찮아. 그냥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져서 말이지. 막내가 내게 차를 대접할 때하고 비슷하군."

 

"부모가 되면 알아채는 게 많아집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그나저나 자네는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는군. 내 조카딸이 나이가 적당한데 만나지 않겠는가?"

 

운은 낮에 루카스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예쁜 장식에 묻은 먼지.

 

"죄송합니다.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상하단 말이지. 여군은 때가 되면 혼인을 하는데 남군은 제때에 하지 않아. 경쟁이 심해서 그런가? 이상하지 않나? 체력이나 힘은 남자가 우세한데, 여자가 더 쉽고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실이."

 

"전투에서 성별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체력적 조건을 갖추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네. 만약 남자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뛰어난 군인이 되지 않겠는가?"

 

"일반적으로는 남자가 더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헛소리일세. 여자와 남자의 능력은 크게 다르지 않아. 세심하게 감정을 읽는 능력이야 여자가 뛰어날지 모르지만, 군대는 그런 곳이 아니지 않은가. 정치도 마찬가지지. 한 수 더 멀리 보는 시야와 경험이 중요한 거지, 눈앞의 사람이 느낄 감정이 중요한 것은 아닐세."

 

유르겐은 말을 끊고 술잔을 비우더니 다시 잔을 채웠다. 운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운 군. 정치가 무엇인지 아는가? 보다 많은 자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일세. 훌륭한 정치는 공익과 크게 다르지 않지. 차이가 있다면 정치가는 이득을 얻기 위해 희생이 불가피할 경우, 최대한의 피해조차 감수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걸세. 군대로 치면 진압을 위해 더욱 많은 적을 사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 자네도 군에서 뼈가 굵었으니 내 말에 동의하겠지?"

 

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 남자는 더 이상의 피해를 늘리지 말라는 이유로 안톤 추격을 반대했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은 정반대다. '깊게 따져볼 문제인가?' 잠깐 고민하다가 이 수수께끼는 잭터에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한 운은 최대한 무난한 말을 골랐다.

 

"사령관님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만."

 

안톤을 추격할 땐 후환을 두지 않기 위해 무리했지만, 기본적으로 잭터는 무혈 승리를 최고로 친다. 카르텔 포로들이 믿고 협력했던 것도 무법지대 출신답지 않은 그의 성향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분은 이상주의자일세. 나쁜 건 아니지."

 

유르겐은 딱 잘라 말하며 운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운은 눈동자만 돌려 시계를 찾았으나 정자에 시계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초와 음식, 그리고 술이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멀리서 시작된 잔잔한 가야금 소리였다. '여긴 내가 있어도 될 곳이 아닌데.' 운은 당장이라도 사령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눌러참았다.

 

"꿈 같은 이상도 중요하지. 하지만 이미 아랫세계와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시국을 냉정히 봐야 할 때일세. 꿈을 얘기하던 시대는 끝났네. 옆 사람의 마음을 읽고 배려하던 게 최상의 처세였던 시절 역시 지났네. 과감하고 때론 무모하게 나아가야 살아남지. 이게 바로 격동의 시대란 것일세."

 

유르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의기가 차있었고, 웅대한 뜻이 느껴졌다. 하지만 운은 알지 못했다. 대귀족이, 황녀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를 놓는 유르겐 가의 가주가, 정적이라고 봐도 좋을 잭터 이글아이의 부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운은 겐트에 있는 누구보다도 자기 평가가 낮은 사람이다.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의 입장이었다면 금방 알아챌 유르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눈만 깜빡였다.

 

유르겐은 술을 한 잔 더 비웠다. 그리고 적당히 뜸을 들인 후 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이오닐 대령. 새로운 시대를 위해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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