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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GEON&FIGHTER

던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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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렁대고 으르렁대며 서류를 읽고 준비를 마쳤을 때는 이미 시간이 가까워진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잭터는 그대로 나가려다가 문득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었다. 저 유명한 헬렌 캐프리 장군의 자서전이었다.

 

"이걸 좀 인용하면 수그러들지 모르겠군... 한 2분 정도는 조용해지겠지."

 

그리고 책을 옆에 끼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사령부를 나와 입궐하여 회의실로 가는 동안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귀족들의 신랄한 공격을 어떻게 넘기고 황녀님의 뜻을 돕게 할 것인가... 그것만을 생각하며 긴 복도로 접어들었다. 먼지 하나 없는 복도에 울려 퍼지는 군화 소리가 2인분. 잭터는 그제야 뒤에서 따라오는 이의 존재를 깨달았다.

 

"자네 왜 따라오나? 여긴 자네가 오면 안 되는데."

 

궐 내는 황녀의 정원이 경비하기 때문에 소속이 다른 호위병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 운은 눈을 깜빡였다. 상관의 목소리는 부루퉁했지만, 딱히 자신에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레, 하지만 남들에게는 평소와 똑같이 들리는 톤으로 물어보았다.

 

"자료는 필요 없으십니까?"

 

'내 정신 좀 보게.' 머릿속에서 귀족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느라 부관이 뭘 들고 오는지도 보지 못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럼 회의실에 두고 나가라는 말을 하려던 잭터는 웬 종이 더미가 자신의 팔 위에 얹어지는 걸 보았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생각이 멈춘 그는 운이 교본보다 정확하게 경례를 붙이고 돌아선 후에야 깨달았다.

 

잭터가 탄식했다. '아, 저놈의 빈틈 없는 사고 과정 같으니.' 화도 못 내고, 그렇다고 상쾌한 기분도 아니게 된 노장군은 멀어지는 등을 보다가 말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한편, 아무것도 모른 채 궐 밖으로 나가던 운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렸다.

 

[...운. 운. 살려줘.]

 

[...운. 내 팔 어딨어? 아파. 아파...]

 

폭발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외부에서 들려온 부름에 부응하듯 갑작스레 떠오르는 비명에 운은 자리에 우뚝 섰다. 심장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주변 풍경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린다. 분명 제자리에 서 있는데, 뒷덜미를 잡혀 빠르게 끌려가는 기분. 심한 멀미와 토기가 동시에 솟구쳐 오른다. 운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서 튀는 붉은 피에 체온이 올라가고, 뼛속까지 흔드는 폭음에 소름이 돋는다. '괜찮아. 괜찮아. 여긴 겐트야. 오늘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폭탄은 터지지 않았어.' 운은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속으로 되뇌었다.

 

자리에서 멈추고 이름이 불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극히 짧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눈을 한 번 깜빡일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지옥이 스쳐지나갔다. 운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현실의 풍경에 집중했다. 눈앞이 흔들리지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잘 열리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안녕하십니까."

 

"응, 안녕. 여기서 보네. 잘 있었, 있었지?"

 

"여긴 웬일인가? 잭터 그 삥따구 따라 온 거야?"

 

세븐 샤즈의 나엔 시거와 메릴 파이오니어였다. 운은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이들의 목소리를 구별하려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메릴이 그런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나? 얼굴이 새하얀데. 어디 아픈 거 아냐?"

 

"괜찮습니다."

 

'당신들은 카르텔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배고픔에 쓰러져 있던 우리에게 폭탄을 던지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운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세븐 샤, 샤즈끼리 모여서 얘기하자고... 안톤 후처리 문제도 있고 파, 파워스테이션 복구 문제도... 그래서 왔어. 운이랑 만날 줄은 몰랐, 몰랐는데... 어디 가는 길이야?"

 

순수하게 기뻐하는 나엔 앞에서 제발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엔은 친근함을 담아 부르는 것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름을 불리는 것에 불쾌해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더 어긋날 수는 없다. 운은 금방이라도 뒤돌아 달려가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사령관님과 함께 왔다가 외부 대기하는 중입니다."

 

"회의하나? 또 귀족들이 난리를 치는 건가? 쯧, 우리 예산도 깎여서 도와주고 싶어도 뭘 할 수가 없어."

 

'알고 있습니다. 사령관님도 기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정보 전달만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말하면 대화가 좀 더 빨리 끝날 테지만 예의 없다고 낙인 찍힐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미 필요 이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운은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이 둘은 운보다 키가 작다. 살짝 숙이는 정도로는 그가 이를 강하게 사리 물고 있는 모습이 가려지지 않는다. 모자 그늘이 얼굴을 충분히 숨겨주길 바라며 운은 나엔의 잡담이 끝나길 기다렸다.

 

"아무튼 그래서... 운도 이따가 같이 갈래? 안 바빠?"

 

메릴은 신난 나엔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사람 사귀기를 어려워하는 나엔에겐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몇 명 없다. 본인은 노력하고 있지만 느리고 어눌한 말투와 독특한 정신세계를 감내해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점에서 운은 괜찮은 대화 상대다. 헛소리를 해도 제대로 들어주고 반드시 대답하니까.

 

"죄송합니다. 오늘은 일정이 있어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어... 그, 그럼 내일은...?"

 

"내일도 곤란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정확한 대답이 친절로 느껴지는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나엔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운을 쏘아보더니 작별 인사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메릴은 낄낄거리며 운의 어깨를 두들겨준 후 느긋하게 제자를 따라갔다.

 

두 과학자와 헤어진 운은 담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나엔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건 알지만 왜 화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대화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는 점이다. 힘주어 쥐고 있던 손을 보니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머리도 어지럽다. 이 상태로는 통행인이 많은 문 근처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끝이 깨진 기와를 보았다. 숨쉬기가 조금 편해졌다.

 

나중에 나엔에게 사과를 해야 할까. 운은 오른팔을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니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은 여성이고 사교성이 좋은 테미 대위라면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지만 부하에게 이런 문제를 상담하는 것은 폐인 것 같다. 부하가 개인적인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것을 귀찮아해 본 적 없지만, 상관이 이런 걸 물어온다면... 과연 정상적으로 보일까. 괜찮은 걸까.

 

"......"

 

운은 평생을 전투 속에서 살았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늘 하던 일이다. 명령대로 움직이면 됐기에 인간관계에 다소 서툴러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생처음 겪는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보이는 적과 싸웠다면, 이제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어울려야 한다. 보이지 않는 적에 둘러싸인 기분이다.

 

"......레베카. 제이..."

 

무서울 땐 도와주러 온다더니.

 

안톤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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