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1 본문 바로가기2 본문 바로가기3

DUNGEON&FIGHTER

던파 스토리

  • 가이드
  • 던파 스토리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음산하면서도 구슬픈 그 소리가 밤의 장막을 흔들어 놓는다. 모두가 잠든 시각. 알프라이라 산 근처 인간들의 주둔지. 목표물에 근접했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다. 전쟁을 앞둔 전초기지 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함정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니콜라스가 가져온 정보는 완벽하다. 목표물은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단지 인간들이 허술한 것일 뿐. 경계가 느슨하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을 의심할 때가 아니다.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 이곳의 지리는 완벽히 숙지했다. 소리를 죽이고 신속하게 목표물이 잠들어 있는 막사로 다가간다.

 

목표물의 애완동물이 막사 곁에서 잠들어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그 옆을 스쳐 지난다. 언제나 그래왔듯 기척은 남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복면을 고쳐 묶는다.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니 목표물이 보였다. 이마로부터 흘러내린 한줄기 길다란 그의 은빛 앞머리가 숨소리에 맞춰 들썩인다.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를 향해 차크람을 겨눈 후 입을 막으며 소리 없이 상반신 위에 올라 탄다.

 

목표물이 눈을 떴다. 휘둥그래진 눈은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듯 하다. 몸을 버둥대며 소리를 치려 했지만 그는 곧 그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칼날이 닿아 있는 그의 목에서 가느다랗게 피가 배어 나왔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더 가하면 임무는 끝이다. 목표 제거 완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내가 뭘 하러 이곳에 왔는지는 알겠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지금부터 당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뗄 테니. 묻는 말에만 답해. 단,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낸다면……」

 

그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린다. 잠시 침상 반대쪽 벽에 뚫린 창문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서서히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그와 동시에 그의 첫 마디가 흘러 나온다.

 

「원로원이 보낸 거겠죠?」

 

나는 대답대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의 목을 향해 차크람을 치켜 세웠다. 그는 잠시 멈칫 했지만 계속해서 하던 말을 잇는다.

 

「날 죽이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럴 거였다면 이미 전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죠. 새도우 댄서에게 급소를 빼앗기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건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정보가 아주 중요한 것이고 그 정보를 얻기 전까지 전 안전하다는 뜻일 겁니다. 제가 틀렸나요?」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흥. 듣던 대로 제법 똑똑한 자로군. 메티가 신용할 만 해. 하지만 안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살려둔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아뇨. 당신은 결코 절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의 표정에서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확신이 넘친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넘겨 짚는 거지?」

「넘겨 짚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아마도…… 미네트님이시겠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정보가 샌 건가? 아니. 설사 정보가 샜더라도 내 이름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도대체 이 자는 어떻게……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그 전에, 일단 이 무기부터 치워 주시겠습니까?」

 

망설여졌지만 이제 와서 위협하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머뭇거리며 차크람을 떼자 그는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낸다.

 

「여왕님의 밀서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원로원의 요원으로 위장한 미네트라는 이름의 아주 특별한 로그가 제게 접근할 테니 그녀와 만나면 가능한 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지시셨죠. 설마 이런 식으로 제 목에 칼을 겨눌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래. 그럼 그렇지. 역시 여왕이었군. 어릴 때부터 언제나 내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 했던 그녀라면 내가 이자에게 접근할 거라는 걸 미리 예상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가만, 그렇다고 해도 이자가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칼을 겨눈 암살자가 나라는 것을 정확히 판별해 낸 건 어찌된 일이지?

 

「내가 편지에 언급된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만약 내가 정말로 당신의 목숨을 노린 새도우 댄서였다면 어쩔 셈이었나?」

 

그는 묘하게 자신감이 섞인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사실은 좀 전에 당신이 한 말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말이라고? 무슨 말?」

「좀 전에 스치듯 말씀하셨죠? '메티'라고……」

 

아차! 허를 찔린 기분이다. 내가 그런 실수를……

 

「메이아 여왕님의 어린 시절 애칭을 알고 있는데다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일개 도적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알아챈 겁니다. 당신이 여왕님께서 서신을 통해 말씀하신 소꿉친구 미네트님이라는 사실을.」

 

여차하면 죽일 생각이었다. 더구나 정체를 들킨 이상 이대로 그를 처리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 실수로 거기까지 알아내다니 이자는 보통 예리한 인물이 아니다. 어쩐지 이대로 살려둔 채 좀 더 지켜보는 것이 흑요정을 위해서는 더 나은 일일 것 같다.

 

「좋아요. 인정하죠.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에 맞겠죠? 함부로 대해서 미안해요. 비록 당신을 떠보려던 의도였지만 칼까지 겨눈 것은 실례였어요. 내 이름은 미네트. 원로원을 위해 일하고 있는 새도우 댄서이자 한때는 로그였던 도적이에요. 당신에게 듣고 싶은 정보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가 석연치 않다는 듯 말한다.

 

「한때는 이라고 하셨습니까? 여왕님께 전해들은 바로는 여전히 던브레이커즈에 소속되어 있다고……」

 

복잡한 이야기다. 때로는 나 스스로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로……

 

「얘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이해할지는 모르겠군요. 왕실 직속 로그집단 소속이기도 한 건 사실이지만 제가 움직이는 이유는 여왕을 위한 것도 원로원을 위한 것도 아니에요. 단지 내 의지에 따라 실리를 따져 협력하는 것일 뿐. 무의미한 편가름 따위는 관심 없어요. 제 행동은 제가 입수한 정보에 의해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 후 나는 드디어 품고 있던 질문을 그에게 던진다.

 

「자,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에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노이어페라에 퍼진 전염병은 정말 인간에 의한 것인가요?」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제 말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제가 처음부터 인간의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실 까봐 물어본 것입니다만 저도 이렇게 중요한 임무에 선입견을 가질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해본 결과를 말씀 드리죠. 전염병은 인간이 퍼뜨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 역시 짐작하던 바였으니까. 허나 그저 짐작만으로는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전쟁을 종용하는 원로원을 설득할 수 없다.

 

「증거는 확보하셨나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라면 원로원을 진정시킬 수 없을 텐데요.」

「애석하게도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모건님의 조사 결과가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인간세계의 동태를 관찰한 보고서가 제가 가진 증거의 전부입니다.」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어떻게 속단하실 수 있죠?」

「저를 믿어 주십시오. 지금은 그 말 밖에는 드릴 수 없습니다.」

 

그에게서 결연한 의지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한눈에 나의 정체를 파악한 것으로 봐서 그는 신중하면서도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런 그가 섣부른 판단을 내렸을 확률은 적다. 게다가 이 정도로 확고하게 이야기 하는 데에는 틀림없이 근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의지가 원로원에까지 통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흑요정이 입을 피해가 어느 정도라고 예상하나요?」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마 종족을 보전하기 힘들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다. 나 역시 임무를 위해 돌아다니는 동안 모험가들을 위시한 인간들을 얕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걸 어렴풋이 체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험가들을 설득해서 흑요정의 편에 서도록 할 수는……」

「안타깝게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설사 일부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피해가 조금 줄어들 뿐 종족이 존망의 위협에 처하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최선은 역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이것으로 확신을 얻었다. 그래. 그게 옳은 길이겠지.

 

「충분한 대답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원로원 측에는 임무 실패에 대해 대강 둘러대도록 하죠. 하지만 그 전에 충고한마디 할까요? 당신의 임무가 흑요정의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죠? 그리고 전쟁을 막으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한 원로원이 당신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계속 하리라는 것 또한 말할 필요가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방비가 너무 허술하군요. 오늘은 운이 좋았을 뿐 제가 아닌 다른 새도우 댄서가 나타났다면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지는 못했을 거에요.」

「사실은 그것 말입니다만……」

 

그는 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후두부를 강타하는 묵직한 느낌에 난 그만 정신을 잃고 만다. 쓰러지면서 창문을 통해 인간 여자가 뛰어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 그를 위협할 때 그가 잠시 응시했던 쪽이었다.

 

「클론터! 뭘 그렇게 뜸을 들여? 처음에 날더러 기다리라는 듯한 눈짓을 한 이유가 뭐야?」

「이런. 또 돌덩이부터 던지고 보시는군요. 제가 손을 든 건 이제 모습을 드러내셔도 된다는 뜻이었지 이 분을 공격하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창 밖에 숨어 있느라 무슨 얘긴지 잘 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이 여자가 당신을 죽이러 온 건 확실하잖아? 그런데 사정을 봐 줄 여유가 어디 있어?」

「이분은 절 암살하기 위해 오신 게 아닙니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군요. 이분이 깨어나시면 뭐라고 사과를 드려야 할지……」

「사과는 하지 않아도 돼요. 전 괜찮으니까.」

 

대답과 함께 내가 대들보에서 뛰어 내리자 인간 여자와 클론터의 눈의 휘둥그래진다. 둘은 바닥에 쓰러진 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모습을 닮은 나무인형과 그들의 앞에 선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눈치다.

 

「너무 놀랄 것 없어요. 제가 그 정도 기습에 당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이것은 설마……」

「네. 쿠노이치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보다 이분은?」

 

클론터는 금새 정신을 가다듬고는 인간 여자를 소개한다.

 

「아. 죄송합니다. 이분은 인간 대표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저와 전략적으로 협력하고 계신 게일 일랩스라는 분입니다. 쌍둥이 자매인 게일님과 브리즈님은 오늘 같은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매일 밤 교대로 제 구조신호에 대비하고 계십니다. 아니 감시라고 해야 하나요?」

 

클론터가 농담이 섞인 듯 말을 건넸지만 게일이라고 불린 인간 여자는 여전히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오히려 그에게 되묻는다.

 

「이봐. 클론터. 방금 그거 뭐야? 위상변화 비슷한 건가? 이 여자 마법사야? 마계인 치고는 너무 까맣고 키가 큰데?」

 

설명하려는 클론터 대신 내가 먼저 입을 뗀다.

 

「마법은 아니에요. 인술이죠. 어쨌든 안심이군요 클론터. 당신을 지켜줄 사람이 둘이나 있다니. 게다가 이쪽은 제법 실력도 있어 보이고……」

「지켜줘? 누가? 이건 단지 아직 캐낼게 남은 인질을 죽게 놔둘 수 없어서 하는 일일 뿐이야. 누군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그나저나 제법이라고? 건방진데? 이봐 흑요정인지 마계인인지 모를 여자. 나랑 한번 제대로 붙어볼래?」

「진정하십시오 게일님. 지금 소란을 일으켜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클론터가 제지하자 인간 여자는 뭔가 아쉽다는 듯 공격 자세를 푼다.

 

「그보다 미네트님.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까는 미처 말씀 드리지 못했지만 여왕님께서 제게 보내신 밀서에는 당신에게 꼭 전해주라고 하신 부탁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령이 아닌 부탁이라…… 훗. 역시 이래서 여왕의 의뢰는 함부로 거역할 수가 없다.

 

「그게 뭐죠?」

「얼마 전부터 여왕님께 아라드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에 대해 보고 드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왕님께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흑요정에게 닥친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하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시죠.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양성할 수 있는 요원의 수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왕님께서는 당신께서 신규 요원을 훈련하는 임무를 맡아 주시길 희망하고 계십니다.」

 

아라드 대륙의 혼란. 소문에 의하면 그것은 사도라 불리는 괴물들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아직 사도가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괴물들이 설치게 되면 언젠가 흑요정의 미래에도 악영향이 미칠 것은 분명하다. 사도의 정체와 이변의 원인에 대한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요원들과 인연을 맺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쉽게 속내를 드러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생각해보죠. 하지만 먼저 이번 임무 실패에 대해 원로원에 보고할 내용을 꾸며내는 게 좋겠어요.」

 

주문을 외우자 미끈하게 생긴 청년이 눈 앞에서 형체를 갖춘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이군요. 저건 사령 니콜라스 아닙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내가 사령술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클론터의 시선에서 경외감이 느껴졌다. 나와 클론터가 거짓 보고내용에 대해 입을 맞추는 동안 게일은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듯 보였다. 잠시 후 간단한 보고 내용을 지시하자 니콜라스는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제는 정말 가봐야겠네요. 새도우 댄서가 이렇게 작전지역에 오래 머무르다간 의심을 살수도 있으니까요. 아까의 제안에 대해서는 마음이 결정되면 제 쪽에서 먼저 비밀리에 연락하겠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클론터와 게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막사를 빠져 나왔다.
달리는 동안 며칠 전 원로원으로부터 전달 받은 지령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마지막 임무, 클론터의 암살을 마치면 인간들의 도시에 머물며 원로원 측의 요원 양성과 정보 수집에 만전을 기할 것. 훗. 우습군. 설마 양 측에서 같은 임무를 의뢰할 줄이야……

 

일부러 신중한 척 하긴 했지만 난 내가 양측의 제의를 모두 받아들일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난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혼란이 잦아들고 흑요정이 운 좋게 인간과의 전쟁을 피한다고 해도 여왕 파와 원로원 파의 정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쟁은 내분으로 이어질 테고 그로 인해 수 많은 흑요정들이 피를 흘리게 되겠지. 그런 골육상잔만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할 줄 아는 거라곤 도둑질과 싸움뿐인 나 같은 일개 도적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래. 어차피 양쪽의 타협이 불가능한 거라면 차선책을 선택하는 수 밖에. 어느 한쪽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않으면 결코 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의 인간과 흑요정의 관계처럼…… 그것을 위해 지금껏 내키지 않는 이중첩자 노릇을 해온 게 아닌가? 허나 분명한 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양측의 이번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양 세력간 힘의 균형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더 많은 로그, 더 많은 사령술사, 더 많은 쿠노이치와 새도우 댄서를 양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흑요정의 평화를 위하는 길임에 한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아야 한다.

 

「이런…… 앞으로 많이 힘들어지겠는걸?」

 

새벽공기가 스치고 지나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혼잣말에 화답하듯 늑대의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고독해서 슬픈 그 울음소리는 영원토록 내 뒤를 쫓을 것만 같다.

 

 

    •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