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 Fig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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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파 A.C.T.>-여거너 24화 (1)

 

 

24화  Interlude(3)

 

 

 

 

 

 

 

“짐은…결국 옳은 일을 한 것인가-”

 

 

옆 침대에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희미하고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짧게, 그 한 마디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것은 제왕으로서의 결정이다. 제왕이라는 존재는 다스리는 자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종종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금 전 폐하가 내린 결정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황녀 폐하가 계신 겐트를 지키는 것은 비단 군인들뿐만이 아니다. 평소에는 그 안에 품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기능하지만, 온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그 원래의 쓰임대로 요새의 기능 또한 충실하게 수행한다. 대부분 최고 등급 기밀로 분류된 방어 시스템들 중 백미라 할 만 한 것은 프로젝트 ‘슬레프니르’로 명명된 다중고도 방공체계다.

도시 상공을 선회하는 수백 개의 소형 위성이 주축이 된 이 체계는 기본적으로 지상과 공중 전체를 감시하는 레이더 역할을 하며, 도시로 날아오는 폭격이나 곡사무기를 탐지 시 그 부근의 위성들이 즉시 연동하여 공간의 연속성 자체를 끊어버리는 ‘역장’을 생성한다. 

이 역장을 필요에 따라 온갖 형태로 전개하거나 투사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탄도 무기는 물론이고, 천계의 가장 진보한 광학 무기로도 격파할 수 없다. 애초에 공간 자체가 이어져 있지 않으니, 이걸 뚫으려면 그야말로 ‘우주를 뚫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겠지. 이 체계 덕분에 1차 황도전쟁에서 황도군은 적의 후방 타격을 상당히 무효화 할 수 있었고, 제공권의 확보와 더불어 전쟁의 승리에 큰 부분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이 체계에도 단점이 있었으니, ‘역장’을 가동하지 않을 때에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전력량이 그것이었다. 평시에도 중규모 발전소 하나 분의 전력을 필요로 하고, 한창 교전 중일 때는 파워 스테이션의 4대 발전소가 번갈아 기계를 불태워 가면서 버텼다고 하니. 실로 무섭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한 연비가 아닐 수 없다.

 

 

폐하의 명령은 바로 이 슬레프니르의 가동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카르텔이 웨스피스에서 숨죽이고 있는 지금, 이 체계 하나를 중지하는 것만으로 도시의 필요 전력을 거의 확보할 수 있다. 이스핀의 외곽을 감시하는 레이더는 이것 말고도 숱하게 있고, 사도로 인해 파워 스테이션이 점령된 지금 어차피 고출력 가동은 불가능하다. 현재 유지 중인 시스템 중에선 가장 위험 부담이 낮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백성들의 생활과 안전을 저울에 함께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체제가 어떻든 제대로 돌아가던 나라란 두 가지를 함께 유지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일 텐데. 계산기를 두드려 더 적은 쪽의 희생을 무시한다. 이런 잔혹한 계산을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녀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쓰러워 참을 수가 없다.

 

 

“괜찮을 겁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겐트의 나머지 방어시스템은 여전히 건재하다. 카르텔 놈들이 아무리 빠르게 접근한다 해도, 황도 외곽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순간 겐트에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건 군인으로서 입에 올릴 만한 말은 아니지만-

 

 

“새해이지 않습니까?”

 

 

그들도 인간이다. 권력을 둘러싼 탐욕과, 이후의 모든 폭력이 벌어지기 전. 천계의 평범한 백성으로서 살아가던 시절의 추억이 그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동요할 것이고, 그런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전쟁을 시작할 명분도 없겠지.

 

 

“-그런가.”

“주무시옵소서. 오늘은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황녀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제대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도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대로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좋지 않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울리는 사이렌, 화염에 휩싸인 도시, 절망에 사로잡힌 황녀님의 얼굴…요새 좋지 않은 일만 거듭된 탓일까, 이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현실로 나타날 것만 같다. 나도 피로가 쌓여 있던 것일까….

 

 

-

 

 

-

 

 

-

 

 

내가 정말로 잠을 잤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눈이, 혹은 마음이 그저 어둠 속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끝에,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소리가 의식을 깨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아직 움직이기 전인 머릿속을 맴돌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우린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등.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하늘이시여….”

 

 

황녀님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셨다. 이 방 뿐만 아니라 병영 전체를 잠에서 깨우는 사이렌 소리는 꿈이 아니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현재 겐트가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 전 병력 수비 위치로! 반복한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순식간에 모든 방에 불이 켜지고, 침대에 누워 있던 대원들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델, 그레타. 너희는 황녀님을 모시고 강녕전으로.”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나와 같이 간다.”

 

 

질문이나 불평 따위는 받지 않는다. 다들 옷은 간신히 걸치기만 한 상태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자기 총은 단단히 쥐고 있다. 앞서 지목된 두 명은 황녀님을 모포로 감싼 채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상황실, 현재 상황은?”

 

 

뒤를 이어 숙소를 박차고 나가면서 마를렌 님이 무전으로 묻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최악의 대답이었다.

 

 

[겐트 외벽과 내벽이 모두 돌파되었습니다! 현재 대대 규모의 병력이 황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맙소사…대체 어떻게?!”

 

 

분명 긴급한 상황임에도 순식간에 온갖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나 금방? 그리고 어떻게? 1차 전쟁 때도 무너지는 일은 없었던 성벽이 이렇게 허무하게 뚫렸단 말이야?

 

 

“여기 지정사수 지원이 필요합니다!”

 

 

다급하게 도착한 황궁 입구는 이미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궁궐 담장에 만들어진 총안구로 다른 대원들이 총알을 쏟아 붓는 중이었고, 바깥에서는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적들의 고함 소리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하늘을 거칠게 뒤흔들고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좋아. 거기 두 명도 따라가도록.”

 

 

서둘러 정문의 가장 높은 초소로 뛰어 올라갔다. 거기서 지원을 요청했다는 건, 일이 최악 중의 최악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여기. 저 놈들, 박격포까지 들고 왔어!”

 

 

이미 그 곳에 있던 대원이 던져준 소총을 들고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댔다. 확실히 아귀 떼처럼 입구를 향해 달려오는 적들 뒤로 바닥에 쪼그려 무언가를 박아대는 병사들이 보였다. 방벽이 곡사 포격은 막아주지 못하는 지금, 저걸 쏘게 내버려 두면 안에 있는 모두가 위험하다!

 

 

“11시, 불타는 차량 뒤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였지만 상황은 단 한 마디도 질문 따위를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대체 저 많은 병력이 거기다 중화기까지 멀쩡히 들고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보이는 족족 쏘아 거꾸러뜨렸지만, 마치 이쪽이 적진 한가운데에 온 듯 거리의 골목골목에서 자리를 채울 적들은 끝도 없이 몰려 나왔다.

 

 

“2시! 서둘러! 놈들이 쏜다!”

 

 

탐조등으로도 완전히 밝히지 못하는 어둠과, 거의 광장에 몰려든 군중을 연상케 하는 숫자 속에서 가까스로 포병을 찾아내 사살했다. 들어 올린 포탄을 포구에 넣기 직전으로, 진짜 위험할 뻔 했다.

 

 

“수비대는 안 오는 거야?!”

“저쪽도 교전 중이야. 죽어도 버텨!”

 

무전으론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우리가 수비라는 유리한 위치고, 적들이 유리한 건 숫자가 전부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가장 중점적으로 훈련하고 대비한 상황이 바로 이런 때라는 점이다.

 

 

“포병은 모두 제거했다. 공중 지원은 가능한가?”

 

[물론이다. 지금 참새들이 가고 있다.]

 

 

성문을 돌파할 방법을 잃은 적들은 광장의 잔해들 뒤에 엄폐하여 이쪽에 총격을 가하지만, 그거야말로 이쪽이 원하던 그림. 수비대의 육상 전력은 어째선지 오지 못하고 있지만, 드론 관제탑은 그야말로 시원스럽게 응답해 주었다.

 

허공에 푸른 인광을 남기며 날아온 다목적 공격 드론. 참새(Sparrow)는 광장에 모인 적들에게 반짝이는 광자 탄환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지상에서의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진 이후, 연기와 흙먼지가 걷히고 나서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목표 명중! 정말로 고맙다.”

 

[천만에. 그쪽은 이제 안전한가?]

 

“아니….”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직 놈들은 공격의 기세를 늦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놈들은 이번엔 황궁에 인접한 건물을 장악하고 멀리서 이쪽을 노리려는 모양이었다.

 

 

“젠장, 내려가자!”

 

 

총알 하나가 피잉 소리를 내며 머리 근처를 지나 벽에 박혔다. 저격수는 우리보다 더 고지대에 있다. 이렇게 되면 놈들에게 노출된 상부 초소에 박혀 있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의 첫 임무는 일단 마친 셈 치고, 아래로 내려가 마를렌 님이 지휘하는 대원들과 합류했다.

 

 

“다들 괜찮습니까?”

“그래. 급한 상황에서 잘 해 줬다. 너희는 다친 곳 없나?”

“없습니다. 건물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야 좋지요.”

“그건…그런데.”

 

 

왜인지 애매한 표정을 하는 마를렌 님. 사실 나도 약간 의문이 들기는 한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겐트 한복판까지 밀고 들어온 적들에게 당면한 과제는 황도군이 정신을 차리고 사방에서 압박해 오기 전에 황궁을 뚫어내는 것. 그런데 한바탕 폭격을 맞고 나서 저들이 선택한 전략은 오히려 주변의 버려진 건물에 숨어들어 농성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러면 폭격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보호를 받겠지만, 이래서야 마치 저쪽에서 시간을 끄는 꼴이 되지 않는가.

 

 

가만, 시간을 끌어?

 

 

[본부! 응답하라!]

 

 

소름 끼치는 예감과 동시에 무전에서 비명에 가까운 비명이 울렸다.

 

 

“그레타?! 무슨 일인가!”

 

 

그레타와 에델…황녀님을 피신시키기 위해 갈라진 조다!

 

 

[황궁 내부에 적들이 있다! 현재 집경당 부근에서 고립되었다! 즉시 지원 바란다!]

“지금 가겠다!”

 

 

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성문을 방어할 최소한의 인원만 남은 채 우리 모두가 집경당 방향으로 달려갔다. 여차하면 방어선이 뚫릴 수도 있었던 그 거센 공격은 정말로 그저 미끼였을 뿐이고, 놈들은 어느 새 이 안까지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다!

 

 

“저기다!”

“제압 사격!”

 

 

하루에 몇 번이고 지나다녀 익숙해진 길을 돌자 그 끝에서 집경당의 한 쪽을 포위하고 공격 중인 적병이 보였다. 일단 우리 중 절반이 빠르게 가한 제압 사격에 놀란 그들은 공격을 중지했고, 그 틈에 나머지가 조준 사격으로 남김없이 쓰러뜨렸다.

 

 

“그레타! 그레타!”

 

 

가까스로 총격이 그친 집경당 안으로 들어가며 온 힘을 다해 외쳤다. 혹시라도, 이미 늦어 버린 것은 아닐까?

 

 

“여기 있어-!”

 

 

다행히 반가운 목소리가 안쪽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안에서는 먼저 떠나보냈던 그레타와 에델이 황녀님과 함께 숨어 있었다.

 

 

“황녀님, 다친 곳은-”

 

 

물으려던 마를렌 님의 말이 멈춘다. 일단 황녀님은 상처 하나 없으시다. 허나, 사색이 되어 들어온 우리 쪽으로 얼굴도 보이시지 않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계시다.

 

 

“에델….”

 

 

에델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단지 가슴 부근에서 희미한 김이 가늘게 피어오른다. 거기에 있는 건 이미 옷을 다 적실만큼 활짝 피어난 붉은 꽃.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얼어붙을 것 같은 공기에 마지막 생명의 연기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가셔야 합니다.”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려 하신 건지, 황녀님의 두 손은 피가 말라붙어 새빨간 장갑을 낀 것처럼 물들어 있었다.

 

 

“…내 탓이네.”

“폐하!”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황녀님을 억지로 들쳐 안았다. 대체 이 안에 얼마나 들어온 건지, 바깥쪽에서 다시 적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에델은…슬프지만 여기에 남겨 두어야만 한다.

 

 

“모두 움직여! 강녕전까지 길을 뚫는다!”

 

 

우리 모두의 동료이자 전우, 그리고 친구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 대신이라고 말하듯, 금세 나타나 길을 막아서는 적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사살하며 울분을 뿜어낸다.

 

 

[빌어먹을, 너희들 살아 있어? 황궁 안이 온통 놈들 천지라고!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모르겠어. 출입구 따위 내준 적 없는데….”

[이쪽도인가. 아무튼 지금 위치가 어디야? 지원이 필요해?]

“지금 집경당에서 강녕전으로 향하는 중이다. 공격에 주의해. 황녀님이 함께 계시다!”

[알겠다. 계속 주시하지.]

 

 

오래지 않아 드론들이 웅웅거리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가까운 위치에서 폭음과 함께 적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지금 우리에겐 목적지에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의 소리이기도 했다. 이제 강녕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 경호 팀? 이쪽에서 보는데 조금, 아니 큰 문제가 생겼다.]

 

 

곧바로 무슨 일인지 물으려 했지만, 다음 모퉁이를 본 순간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늦었어….”

 

 

강녕전이 불타고 있었다. 이미 화마에 휩싸여 들어갈 수도 없게 된 집을 향해 연신 소이탄을 던져대던 병사들은 우리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등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우리는 늦었다. 뿐만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다. 이곳으로 침투해 들어온 적들은 그저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할지, 어디로 향할지 간파하고는 거기로 향하는 길을 최대한 지체시키고 하나씩 확실하게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 공격은 궁 내부를 잘 아는 자의 계획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목표로 하는 것은 단 하나.

 

 

“상황실, 탈출 경로를 부탁한다.”

[…알았다.]

 

 

애초에 여기로 와서는 안 되었다. 황녀님을 벙커에 모시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생각 자체가 물러터진 것이었다. 황궁을 버려야 한다.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상황실은 명백히 침울해진 목소리로, 하지만 신속하게 요청을 수행한다.

 

 

[서쪽 문. 각사 앞마당을 지나는 루트가 지금으로선 가장 안전하다. 수비대에도 호송 병력을 보내도록 전달하겠다.]

“고맙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겠다.”

 

 

드넓은 세상에 비하면 좁다고만 느껴졌던 황궁이 사실은 이렇게나 넓었던가? 구불구불 이어지는 통로의 모든 구석과 벽 너머를 확인하며 한 걸음씩 신중하게 발을 옮긴다. 보이지 않던 공간 너머로 몸을 내밀 때마다 은폐하고 있던 적이 이번에는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지 않을까, 자꾸 서두르고만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위치를 옮기는 동료를 엄호하고, 사방을 번갈아 경계한다. 적들이 곧바로 튀어나오지 않는 만큼, 초조함은 오히려 무럭무럭 커져만 간다.

 

 

“이상하군.”

“역시 그렇습니까?”

 

 

집경당과 강녕전에서는 그렇게나 들러붙더니, 이제는 오히려 나타나지 않는 것이 수상하다. 분명 무언가 함정이 있을 텐데.

매복? 하지만 저 정도의 병사들로는 이곳의 벽돌 하나하나까지 익숙한 우리의 눈을 속일 수 없다. 단순히 놓친 거라고 하기에도 무질서하게 쏘다니는 병사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상황실, 정말로 이쪽에 아무도 없는 것 맞나?”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상황실? 상황실, 응답하라!”

 

 

아무리 불러 보아도 통신은 고요할 뿐이다. 정말로, 생각하기도 싫지만 저쪽은 이미….

 

 

[경호팀, 여기는 관제탑.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무슨 일인가?”

 

 

갑자기 관제탑으로부터 당황한 목소리로 무전이 들어왔다.

 

 

[위험해, 지금 놈들이 그 쪽으로- 아악!!!!]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모든 소리를 뭉개버리는 폭음과 함께 무전은 강제로 끊겼다. 1초쯤 지나서, 여기서 귀로 직접 들을 수 있는 무거운 폭발음이 먼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아아….”

 

 

바닥이 없는 침묵은 오직 공포만을 낳는다. 관제탑은 통신이 끊어지기 전에 분명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이 끝에 치명적인 ‘위험’이 기다린다는 것.

허나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의 단서가 전혀 없다. 나아갈 수는 없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황녀님이 함께여서는 위험 속으로 스스로 머리를 들이미는 짓은 언어도단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여기서 그저 발이 묶여 버린다.

 

 

“상황실? 관제탑? 누구라도 응답 바란다! 지금 여기-”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건가? 제발 대답해 다오.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려.]

 

 

다리가 후들거리는 침묵 속에서 가까스로 한 명의 목소리가 잡힌다. 허나 그것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희미하고. 불완전했다.

 

 

“상황실! 무사했는가!”

[엎…드려!]

 

 

간신히 짜 내는 목소리로 그 한 마디만을 내뱉고 무전은 다시 끊어졌다. 그리고 거기에 의문을 채 묻기도 전에 어떤 소리가 일대의 침묵을 깨뜨렸다. 마치 넓은 철판 위에 쇠구슬을 떨어뜨렸을 때와 같은 날카로운 파열음. 총성과는 확실히 다른, 그보다 훨씬 위험한 소리.

 

 

“!”

 

 

팀원 모두가 그 순간에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황녀님을 바닥에 쓰러뜨리곤 그 위로 몸을 덮었다. 그 뒤에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 뿐이었다.

 

 

-----

 

 

첫 번째 포탄이 떨어지고 나서 귀는 이미 멀어버렸다. 그럼에도 바닥을 타고 퍼지며 뱃속을 헤집어 놓을 것만 같은 충격과 피잉 하고 귀를 스치며 날아가는 파편, 들이마시지도 못할 만큼 짙은 먼지 구름이 지금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생하게 알도록 했다.

마치 모든 것이 평소의 10배 정도로 느리게 재생되는 듯 했다. 살아날 방법 따위 떠오르지 않는다. 변변한 엄폐물도 없이 적 박격포의 탄착 지점에 노출된 이상, 할 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다만 황녀님만을 맨 아래에서 보호한 채, 우리 모두는 잡을 수 있는 동료의 손을 일제히 맞잡았다. 서로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이 지옥 속에서 유일한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허나 그 날, 우리에게만은 그 어떤 하늘도 무심하기만 했다. 대체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걸까. 온 몸이 다져지는 한이 있어도 놓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 손은 지근거리에서 터진 폭발과 함께 너무나도 쉽게 풀어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나 또한 충격으로 잠시 동안 하늘을 날며 원망스러운 저 위를 응시했다. 내가 지금 죽은 것인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충격이 다시 뒤통수를 때렸을 때에야, 이 세상이 조금 더 날 괴롭힐 심산임을 짐작할 뿐이었다.

 

 

-

 

 

기침이 나왔다. 폐 속에서 한바탕 불을 피우고 난 재가 한가득 쌓여 있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들어 확인한 두 손은 놀랍게도 두 쪽 다 붙어 있었고, 당연히도 마구 찢어져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황-녀님-”

 

 

입에 붙어 버린, 하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던 이름을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는 온통 피와 살의 바다였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죽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잘려나가고 흩어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신체의 파편이 마치 쓰레기처럼 흩어져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아니카, 그레타, 순서대로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동료, 전우, 친구들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알아볼 수 없다. 포탄이 떨어진 게 내가 있는 방면이었다면 내가 이런 꼴이 되었겠지-차라리 그렇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리제….”

 

 

눈물과 함께, 잊어야 하는 이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언제나, 언제나 이렇게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는데. 결국 살아 있을 때에 불러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여기서 내가 살아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그냥 여기서 다시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이다. 손에 쥐었던 모든 온기가 사라지고, 뼈를 찌르는 것 같은 냉기가 살을 파고 들어온다. 허나 그것조차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누구든 빨리 이 끈덕지게 붙어 있는 숨을 거둬가 주길-

 

 

“-미-”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밝아오지 않는 이 밤의 악몽. 그 안에서 이렇게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온단 말인가. 아직 얼마나 나에게 괴롭힐 것이 남았기에, 두 번 다시 들릴 리 없는 환청이 들린단 말인가.

 

 

“레미-!”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았을 때, 급격히 돌아오는 의식에 그만 바닥에 쓰러질 뻔 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피바다의 한가운데, 간신히 빠져나온 손 하나가 연약하지만 필사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그만 비명을 지르며 그 장소로 달려들었다. 문자 그대로 온 몸을 다져 가며 죽어 간 동료들의 몸 아래. 살아 있었다. 그녀들은 실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우리는 모든 것을 위한 하나를 지키고 있었다.

 

 

“이건…모두-”

 

 

간신히 바깥으로 끄집어낸 그녀는 주위의 광경을 보곤 나와 마찬가지로 말을 잃었다. 마치 바람에 쓰러진 나무처럼, 두 다리가 힘을 잃고 죽음들 위로 무너져 내렸다.

 

 

“가셔야 합니다….”

 

 

허나 내버려 둘 수 없다.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서 나는 마지막 있는 힘을 짜내 황녀님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 난 쓰러질 수 없다. 아직, 난 그녀들과 함께 죽을 자격이 없다-!

 

 

“조금만…더…가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팔다리에 박힌 파편들이 비틀리며 생살을 헤집어 왔다. 지금의 나에게 그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의식이 고통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붙잡을 만 해졌으니까. 약속된 탈출 장소인 황궁 서문이 저 너머에 보인다. 저기까지만 가면, 황도 수비대의 지원 병력이 황녀님을 안전하게 모실 것이다.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내가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임무다.

 

 

“레미, 눈 감지 마. 저기까지만 가면 돼.”

 

 

깨닫고 보니 황녀님이 나를 부축하고 계셨다. 방금까지 흐르던 눈물 자국이 얼굴에 선명한데도, 어느 새 눈빛은 힘을 되찾아 나를 지탱해 주고 계셨다.

 

 

“레미!”

 

 

그래서야 곤란하다. 황녀님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다니, 나 같은 것이 그녀의 발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 아프다. 파편과 화약, 그리고 아마도 친구들의 뼈와 살이 날아와 박혔을 다리는 금방이라도 문드러질 만큼 아프다. 하지만 서야 한다. 앞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죽더라도 내 마지막 임무를 수행ㅎ

 

 

“레미이이이!!!!!!!!”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고, 어째서인지 내 몸이 다시 한 번 허공을 날았다. 또 다른 폭발? 이라고 잠시 착각했다. 무언가가 내가 기대고 있던 담장을 뚫고 날아와 그대로 나를 날려 버렸다. 황녀 폐하가 멀찍이 보일 만큼 멀리에 떨어져, 나는 겨우 날 공처럼 날려 버린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오늘 사람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눌러 쓴 베레모로부터 늘어진 금발. 언뜻 섬세해 보이는 그 얼굴과는 불쾌할 정도의 언밸런스를 이루는 거구(巨軀)의 남자. 양 팔에서 번뜩이는 철완(鐵腕)은 틀림없다. 돌격대장. 카르텔 최고, 최악의 살인귀로 불리는 자.

 

 

“란제루스….”

 

 

그는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못하는 나를 흘끗 보고는 곧바로 그 앞에서 얼어 버린 황녀님에게로 다가갔다.

 

 

“설마하니 이렇게 일이 깔끔하게 될 줄이야.”

“무슨…소리냐!”

 

 

황녀님의 목소리에는 나조차도 등골이 오싹하게 할 만큼의 노기가 서려 있었으나, 그는 비웃듯 콧방귀를 뀌고는 자기 할 말을 계속해 나갔다.

 

 

“사실 같이 죽어 버릴 거라 생각했다고. 그런데 그걸 자기 몸들을 갈아 넣어 지키다니. 덕분에 난 최고로 이득을 보았단 말씀이야.”

 

 

그가 이야기하는 게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나도 이런 거 하나 가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정원’ 이란 거.”

“네 이놈!”

 

 

황녀님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그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또 있을까, 순식간에 멱살을 잡혀 들어 올려졌다.

 

 

“폐…하-!”

“그래. 따귀 정도는 쳐 보라고. 그런데 그걸로 되겠어? 내가 봐도 계산이 안 맞는데.”

 

 

황녀님을 제 얼굴 앞까지 들어 올려 능멸하는 란제루스. 당장 달려가 놈의 머리를 떨어뜨리고 싶어도,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 그저 비참하게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을 뿐, 아무 것도 할 수가-

 

“윽-!”

 

 

별안간 놈이 얼굴을 찡그리며 황녀님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간신히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폐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시다. 인상을 한껏 일그러뜨린 란제루스의 허벅지에는 익숙한 모양의 단검이 꽂혀 있었다.

 

 

“마를렌!”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서 있지도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상반신만으로 기어와 놈의 다리에 칼을 꽂은 것이다.

 

 

“칼…정도는 주마…!”

“안 돼…!”

 

 

온 몸이 피에 적셔진 형상을 하고도 씩 웃어 보이는 마를렌 님. 허나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태를 파악한 황녀님의 얼굴이 다시 절망으로 물든다.

 

 

“그거 기쁜걸.”

 

 

놈이 그대로 마를렌 님의 팔을 잡고 들어올렸다. 반쯤 시체가 되었음에도 꼿꼿하게 놈의 눈을 마주 바라보는 그녀. 비록 무력할지언정, 그 기개만은 우러러 볼 만 한 것이었다.

 

 

“안 돼-안 된다!”

 

 

황녀님의 절규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그녀의 다른 쪽 팔을 잡았다. 그리고

 

 

“아아아아아!!!!!!!!”

 

 

그대로 그녀를 두 쪽으로 찢어 버렸다.

 

 

“아아, 아아아…!”

 

 

단말마의 비명 소리.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남겨진 자의 탄식 소리.

 

 

“우리 녀석들보다 낫군. 조금 살려 뒀으면 좋았으려나?”

 

 

움직여야 한다. 저 증오스런 놈은 여기서 얼마라도 더 피를 볼 생각이다. 저대로 뒀다간 황녀님은-!

 

 

“…여라.”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자포자기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으로부터 나온다.

 

 

“날 죽여라…죽이란 말이다!”

 

 

목소리는 고통과 노여움으로 가득했지만, 그 의미는 오직 통곡.

 

 

“어째서 이렇게까지 한다는 말이냐-그냥 나를 죽이란 말이다! 뭘 위해서. 대체 뭘 위해서….”

 

 

머릿속은 분노와 슬픔으로 미칠 것 같지만, 팔다리는 그 정반대로 꿈쩍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어디가 부러지고 만 걸까, 남아 있는 힘을 어떻게든 짜내 봤자 그에 비례한 고통만 밀려올 뿐이었다.

 

 

“그것도 좋지만-여기에 더 좋은 게 있군.”

 

 

바닥에서 낑낑거리는 날 발견한 란제루스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분명 너는….”

 

그는 내 머릴 붙잡아 들어 올리고는,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때? 네 소원대로 이 년과 여기서 같이 죽여줄까?”

“….”

 

 

황녀님의 말문이 막힌다. 이미 피와 먼지로 반쯤 멀어 버린 시야지만, 그녀의 몸이 공포와 절망으로 떨리는 것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허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놈은 묻고 있지만, 궁금해 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어느 쪽도 선택할 힘이 없는 우리를 비웃고 즐기려는 것 뿐.

 

 

“…그녀만은….”

“그럼 그렇지.”

 

 

녀석은 내 허리춤에 아직 매달려 있는 무전기를 잡아채, 통신 버튼을 누른다.

 

 

“아-들리나? 아무나 상관없으니 들어라.”

 

 

게임은 끝났다. 우리의 임무는 실패했고, 적들은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 나는 부끄럽게도 목숨을 부지한 채, 그들의 수괴가 승리를 선언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황녀는 우리와 함께 있다. 그녀는 자기 부하의 목숨을 살리는 대신, 우리와 함께 떠나는 것에 동의했지.”

 

 

안…돼!

 

 

“너희가 아직 지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허나 이쪽은 이미 볼 일이 끝났지. 그러니-지금 여기서 황녀의 목을 비틀지 않는 조건으로, 우리를 얌전히 돌려보내 줬으면 좋겠군.”

 

 

상황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황녀님은 마치 죄인처럼 손이 묶인 채, 자신이 다스리던 황도의 길을 다름 아닌 적들의 수괴와 함께 걸었다. 도시의 백성들, 그리고 그 동안 목숨을 바쳐 싸우던 병사들이 길 양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느끼고, 혹은 이를 갈았다.

나는 마찬가지로 손발이 결박되어 들것에 실려 그 길을 지나갔다. 황녀의 정원 유일한 생존자로서,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을 것이다. 지키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했다. 그것도 정말 하찮기 그지없는 이유 때문에. 가장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 무릎을 꿇게 만들어 버렸다.

 

 

기다리던 아침의 해가 떠오르며 그런 우리를 비추고, 지난 밤 어둠을 틈타 벌어진 폭력과 파괴의 현장이 햇살 아래 그 흉물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민간의 크고 작은 행사나 장마당이 열리던 황궁 앞 광장은 부서진 엄폐물과 잔해로 가득했고, 출퇴근 시간이면 붐비기로 악명이 높았던 오륜대로는 텅 비어버린 채 황도를 빠져나가는 행렬들만 줄지어 걷고 있었다. 

도시는 불탔고, 사람들은 슬픔에 빠지고, 황궁은 그 주인을 잃었다. 모든 것이 비참한 모습으로 변했지만 단지 하나. 이 모든 일에 무심하기 그지없는 하늘만이 푸르게 얼어붙은 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겐트의 모습이었다.

 

 

 

-

 

 

 

장소는 다시 하늘성.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상의 3배 이상은 길어져, 분위기도 그 이상으로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무심코 아랫배 부근에 손이 간 것을 얼른 치워버렸다. 이건 괜찮다. 괜찮을 거다. 분명.

 

 

“…그 다음에는?”

 

 

피오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대로 황녀님과 함께 웨스피스로 압송되었습니다. 인질…이라는 것이지요.”

 

 

그 와중 당했던 입에 담을 수 없는 취급. 말이나 글로만 접했던 서쪽 대륙에 도착하고 나서는 곧바로 수용소에 갇혀, 올지도 확신할 수 없는 구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대체 얼마큼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누더기가 된 옷 사이로 파고들던 추위도 거짓말처럼 물러가고, 매캐한 모래바람에 실려 정말로 알아채기 어려운 봄의 온기가 찾아올 무렵. 나는 겨우 탈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잠깐 동안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황녀님을 구하러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것이 ‘황녀의 정원’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어찌한단 말인가. 지도로만 보았을 뿐 와본 적도 없는 이곳. 거기다 경보가 울리기 시작한 적진 한가운데에서 여기에 계신지도 모르는 황녀님을 구하고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그저 핑계일 뿐이겠지. 나는 무서웠던 거다. 몇 번이나 기대를 배신하고, 임무에 실패하고,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내가 몸을 맡길 곳이라 유일하게 생각했던 장소는 이제 없다. 정원에 피어난 한 떨기 꽃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다. 적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그녀를 다시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 상황에서 정말로 있는지도 모르는 ‘아랫세계’에 대한 전설은 좋은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떨어졌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잔혹한 운명은 이번에도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고, 숨을 들이킬 때마다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을 되새기게끔 했다. 내가 여기로 떨어져 겪은 모든 위험과 고통. 그것들이 모두 그 순간에 황녀님을 등진 것에 대한 벌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시 양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 날 피바다에서 깨어났던 그 순간에 비하면 깨끗하고, 상처도 희미하다. 하지만 마음은, 더럽혀진 영혼은 그 때로부터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몸이 편안함에 잠기려 할 때면 눈앞에 떠올라 채찍질하고, 행복을 느끼려 할 때면 노여움에 차 꾸짖는다. 뒤에 남겨 두고 온 죽어간 동료들, 붙잡힌 주군이.

 

 

“돌아가야만 합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전장으로.”

 

 

또는

 

 

사지(死地)라 불리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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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v100
  • 델리가없져
  • 진(眞) 미스트리스 바칼

    모험단Lv.37 깊은산속오두저택

일부 아바타는 게임과 다르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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