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파 A.C.T.>-여거너 23화 (1)
23. Interlude(2)
“….”
“…….”
방 안에 침묵이 흘렀지만, 그 분위기는 입을 다무는 것과는 전혀 방향이 달랐다. 보통 입을 다무는 행동은 대화를 거부하는 걸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듣고 있으니 어서 이야기를 계속해라’ 라는 거겠지.
“저….”
거기서 내게 잠깐의 휴식을 허락한 건 의외로 숨을 죽이고 경청하고 있던 세리아 양이었다.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나요?”
다행히 그 이야기의 결말은 그녀의 소망대로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
“네. 산모도 아이도 모두 건강했어요. 여자아이였고, 정말로 예뻤어요.”
그 때, 황녀님과 우리는 산모가 해산을 마칠 때까지 곁을 지켰다. 황녀님이 곧 도착한 의관과 함께 산모를 돌보는 동안, 우리는 동요하는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궁에서 도착한 물자의 분배 작업을 도왔다. 점심 무렵도 되기 전에 시작한 일은 해가 거의 넘어갈 무렵, 골목 근처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끝을 맺었다.
난방 전력을 복구했음에도 방 안은 여전히 겉옷을 벗기가 꺼려질 만큼 찬 공기가 물씬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는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듯 요란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 몸이 식지 않도록 서둘러 수건에 싸고 나서, 산모는 마치 답례라는 듯 소중하게 들여다보던 아이를 황녀님께 내밀었다.
작지만 더없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한 생명을 품에 안고 한 나라의 지배자는 침묵했다. 이런 일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지, 그리고 그들 위에 서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지식으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어떤 대의명분도 용납지 않고 그저 ‘살고자’ 하는 한 생명 앞에서 그녀는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엇이 옳은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 아이도 결국엔 내정(內政)의 문서에 기록되는 숫자 중 하나일 뿐인데, 지금만큼은 이 하나의 목숨이 온 천지보다 더 값지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것은 그녀 자신 이외에 누구도 알지 못할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네.”
“믿을 수 없을 만큼.”
제국 기사 일동은 의외로 더욱 크게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네. 확실히-파격적이었죠.”
“그 정도가 아니야. 만약에 레온 폐하가 그러셨다면….”
“…그 마을, 지금 지도에 남아있지 않을지도.”
조금 뒤숭숭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기사. 아무래도 제국의 황제 폐하라는 분은 꽤나 두려움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황녀라는 분도 상당히 터프한 편이었고.
아무튼 그녀들의 말대로 지금 이 이야기가 그저 미담으로만 끝이 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점은, 언뜻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건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
시간은 아주 조금 더 흘러, 오늘 하루의 일이 모두 마무리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 황녀의 정원 대원들이 머무는 숙소. 오늘은 특별히 여기에 한 명의 잠자리가 추가되게 되었다.
“오히려 이게 훨씬 낫지 않은가.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구나.”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으신 황녀님은 요즘 보기 드물게도 들뜬 표정을 하고 계시다. 품에는 베개까지 끌어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말겠다는 의지가 눈에 생생히 보이는 것만 같다.
“황녀님, 저희라면 괜찮으니 차라리….”
“싫네. 짐을 지켜야 할 자네들이 감기라도 걸려 비실비실해지면 짐은 어쩌라는 말인가?”
“그러니까, 저희는 이 정도로”
“아니면, 짐 혼자 저 얼어붙은 집에 가서 자라는 건가? 마를렌, 그대가 그런 말을 하다니, 짐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구나.”
짐짓 울먹이는 체 마를렌 님의 말을 돌리는 황녀님. 그 모습은 영락없이 나이가 많은 언니에게 떼를 쓰는 여자아이의 그것이라서, 곤혹스러워 하는 마를렌 님과는 별개로 우리는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을 숨기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니면 그건 어떤가? 강녕전의 불을 켜고, 자네들도 다 같이 자는 걸세. 그거라면 영감들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 아닌가?”
“…침구를 준비하겠습니다.”
어떨 때는 연령을 믿을 수 없도록 근엄하시면서도, 이럴 땐 조금 무엄하게 들리지만 깜찍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우리 대원들에게는 염라대왕과 같은 마를렌 님도 이 고집 앞에서는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일쑤. 물론 나머지라고 다를 건 없다.
사실 분위기와는 별개로 상황은 절대 축하하거나 좋아할 일은 아니다. 낮에 가게 된 마을 한 구역에 전력을 공급하는 대가로 멈추게 된 곳은 황녀님의 처소. 강녕전이었다. 난방 시설만 아니라, 유사시에 황녀님의 신변을 지킬 수 있는 경비 및 비상 대피 시스템도 정지. 당연하지만 그런 곳에 황녀님을 머무시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곳이 우리들의 숙소. 수차례 간언했음에도, 궁인(宮人)들의 처우에 관해서 황녀님은 한 치의 차감도 용납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지금은 황궁에서 가장 따스하고 아늑한 곳이 우리들의 방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흠, 강녕전에 모두를 데려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네만. 다음에는 그리 하지 않겠는가?”
“저는…아직 담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것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일이지만, 우리가 강녕전에서 자는 것 역시 황녀님이 여기서 주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정이 뒤집힐 만 한 일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만에 하나라도 밖으로 새 나가는 순간, 모두가 시말서의 산에 파묻히는 꼴이 되겠지.
“알고 있네. 짐에게는 짐의 자리가, 그대들에겐 그대들만의 자리가 있다는 것. 지금 이대로 있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분명 짐의 마음이 약해진 탓이겠지.”
“황녀님….”
황녀님은 침대에 걸터앉으시곤 조금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 기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평소 황녀님이 게시는 강녕전은 안락하기론 이곳과 비할 바가 아니지만, 한 나라의 수장이 기거하는 곳이니만큼 가장 철저한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 또한 그곳에 발을 들이는 건 거의 경호 업무를 맡았을 때 뿐, 지금처럼 얼굴을 맞대고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리 넓다고, 아무리 편하다 해도 벗 하나, 이웃 하나 마음대로 들일 수 없는 그런 집에서의 생활은 역시 외롭지 않을까. 그렇게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거기! 얼른 문 좀 열어 봐!”
복도 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 서둘러 문을 여니, 마를렌 님과 몇몇이 창고에 있던 여분의 침대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이나 요 따위는 강녕전에서 옮겨 왔지만, 침대 자체는 역시 여기에 있는 것으로 쓸 수밖에 없다.
“흠, 그냥 옆에서 같이 자는 건 안 되는가?”
“안. 됩. 니. 다.”
말은 이렇게 하지시만, 방 안에 공간을 내고 침대를 조립하는 것을 황녀님은 곁에서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계시다. 마를렌 님 역시 조립을 마친 침대에 정성스럽게 커버를 씌우고, 방 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에 끌어다 옮겨 놓는다.
“후후, 마치 소풍이라도 온 기분이로구나.”
황녀님은 폴짝 하고 침대 위로 뛰어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마를렌 님도 어느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말끔하게 쪽을 지어 올린 붉은 머리도 풀어내려 허리 부근까지 내려오니,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한 ‘여자’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도 누군가와 사랑을 하게 될 텐데, 적어도 이 정도의 미모라면 떨어뜨리지 못할 남자 따윈 없지 않을까.
아, 외모 말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라면…부디 이해심 많은 상대를 만날 수 있길 빌자.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군. 먼지 냄새도 나고. 하지만”
그대로 황녀님은 내 쪽으로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으셨다.
“그게 다 용서될 만큼 행복하구나.”
그 미소를 보는 나의 기분도 정확히 그와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마를렌, 요즘 들리는 말이 있더군.”
“예? 저 말입니까?”
“그래. 듣자 하니, 가까워진 남성이 있다고 하던데.”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방 안의 인원들 전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나도. 방금까지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인데, 나만 몰랐던 거야?!
“에? 진짜?”
“마를렌 님, 너무합니다!”
“어떤 분이신데요?”
당연히 난리가 난 인원들을 손짓으로 제지시키며, 마를렌 님은 침착하게 대답한다.
“황녀님. 무엇을 들으셨든,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궁인들 사이에서 흘러 다닐 뿐인 소문을 함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흐음, 그런가? 그렇다면 지난 비번일에 루프트 하펜 부근에서 목격되었다는 건 잘못된 정보였나 보군.”
루프트 하펜은 해상 열차가 운행되는 항구 도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로도 유명하다. 아무래도 각 대륙의 문물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일까, 사람의 만남도 활발하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 때는 그레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지?”
“네. 분명 주방에서 쿠ㅋ-”
“그렇다고 하네요. 어떻습니까?”
뭔가 말을 덧붙이려던 그레타를 마를렌 님이 자연스럽게 가로막는다.
“그러면, 최근 묘하게 사복이 늘었다는 소문도 역시-”
“본가에서 보내 준 것입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춥지 않습니까?”
황녀님은 짐짓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본 적 있다, 이 패턴. 이대로라면 분명….
“이번에 받은 선물은 향수였나?”
“아니요, 직접 만든 팔찌…였….”
빙고. 걸려들었다. 일부러 잘못된 추측을 흘리다가 슬쩍 방향을 바꿔 찌른 심문에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말았다.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상대가 숨기고 있는 걸 알아내는 술책은 황녀님의 특기 중 하나. 때문에 폐하가 무언가를 질문하실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이 정도로 능숙하게 상대를 다룰 줄 아니, 귀족원의 영감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거겠지.
“-------”
방 안은 곧 대원들의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외침으로 떠나갈 듯 요란스러워졌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승냥이 떼처럼 굶주린 처자들이 달려들어 마를렌 님을 덮쳤다. 당연하지만 그 승냥이들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누구예요? 누구예요?!”
“잘 생겼어요?”
“대체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감시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조금 위험한 발언이 섞인 것 같은 질문 세례 속에서 그녀는 본인의 머리칼만큼이나 빨개진 채 우물쭈물 변명 같은 대답을 늘어놓는다. 평소의 엄격하고 빈틈없는 모습과는 하늘과 땅 만큼 떨어진 의외의 모습. 하지만 그녀의 사적인 자리에서의 모습을 아는 우리에겐 그다지 신기한 구경은 아니다.
“그게…재작년….”
한 마디씩 자백이 나올 때마다 소란은 잦아들긴 커녕 더욱 부풀어가기만 한다. 재작년이라. 에르제 폐하의 즉위식 무렵이 아닌가. 그 점에 관해서는 폐하 역시 놀라시는 중이다. 그렇게 오래나 잘도 들키지 않았구만.
아무튼 그 '자백들'을 종합해 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건 놀랍게도 카르텔의 1차 침공이 막바지로 치달아가던 무렵. 마찬가지로 황도군이였던 그는 당시 비공식 임무를 수행 중이던 마를렌 님의 파트너로 배정되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지금은 기밀 해제가 되었습니다만, 당시는 벨드런 님이 계셨을 때이니 모르셨겠지요.”
전장에서 함께 구를 때. 특히나 그것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어깨를 맞댄 전우들 사이에서는 강렬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하물며 그들의 임무는 위험하기로는 손에 꼽는, 적의 핵심 기지에 잠입하는 일. 두 남녀가 그 임무에서 짝이 된 것은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임무의 내용은 과거 황도 측에서 카르텔로 전향한 요인의 추적. 비록 본인을 잡지는 못했지만, 단 두 명이서 기지 하나를 거의 못 쓰게 만들고 다수의 유용한 정보를 확보했다. 그대로 탈출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황.
“참, 평소엔 그렇게 강한 척을 하더니, 총알 한 발 박혔다고 어찌나 우는 소리를 내던지.”
탈출 끝자락에서 부상당한 그를 간호해 준 것은 당연하지만 마를렌 님이었다. 약해진 남자와 그를 머리맡에서 보살피는 여자. 낭만 소설에 써도 좋을 훌륭한 구도다. 예상대로 그 때 처음으로 고백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가면 유난히 수줍음이 많아지는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소독용 알코올을 그대로 그의 상처 위에 쏟아 버렸고, ‘첫 번째’ 고백은 그렇게 흐지부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넘어갔다.
두 번째는 시간이 꽤 지난 뒤, 이번에는 마를렌 님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정확히는 ‘꺼내려고’ 했었다. 문제는 애정의 표시랍시고 그녀가 만들어 온 도시락. 공교롭게도 거기에 들어있던 재료 중 하나가 상한 것인지 그가 먹은 직후 배탈로 앓아누웠고, 이 불운한 남녀는 또 몇 주를 그냥 흘려보내야만 했다.
“….”
“…그거 ㅁ”
“운이 나빴네요.”
“재료가 잘못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 사이의 암묵의 룰이다. 그 덕에 가끔씩 그 ‘암흑 물질’을 먹게 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만…‘적의 고문에 대비한 훈련’이라 부르며 모두가 견뎌 내고 있다. 개중에는 의외로 적응에 성공한 대원도 있으니, 역시 생명의 힘은 위대하다고 하겠다.
결국 말로 하는 약속 따위 건너뛰고 두 사람은 각자의 부대에는 비밀로 하고 몰래 밀회를 지속했다. 잠입 작전 당시의 실력은 녹슬지 않아 꼬박 두 해를, 그것도 경호와 첩보가 주 임무인 황녀의 정원 소속 가십에 굶주린 야수들을 상대로 비밀을 지켜온 것이다. 실로 존경스럽다.
“자, 그럼 이번에는 당신 차례입니다.”
“에? 설마!”
“너어어어-!”
아뿔싸, 방심하고 있던 사이에 그녀가 화제의 화살을 이쪽으로 돌렸다. 방금까지 그쪽에 달라붙어 있던 굶주린 야수들이 이번에는 나를 향해 그 눈을 번뜩인다.
“저기, 전 별로….”
신변, 그 외의 여러 가지 위협을 느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도중, 나를 포함해 장난기로 가득해 움직이던 모든 이들의 몸이 한 순간에 바짝 하고 굳었다.
[--해! 진--라고!]
[이거--드려--해!]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명백히 격앙되어 다투는 목소리.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무언지는 몰라도, 복도 쪽에서 꽤나 험악한 상황이 일어난 것 같았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재빨리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니, 거기에는 눈가를 눈물로 적신 채 숨을 몰아쉬는 아니카와 그녀를 붙잡은 에델이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마침 잘 왔어. 제발 아니카 좀 말려 봐!”
에델의 말에 따라 우선은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향했다. 무슨 일이든, 일단 황녀님께 쓸데 없는 걱정을 끼칠 수는 없다.
“아니카, 대체 왜 그래? 오늘 황녀님이 여기 묵으시는 거 몰라?”
“알아. 그래서 이러는 거야!”
“하아- 그러니까 말이지-”
에델이 미치겠다는 듯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는다. 아니카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한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나에게 넘긴다. 뭔가가 찍혀 있는 사진 몇 장이었다.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심하게 구겨져, 알아볼 수 있을 펴는 데에도 꽤 시간이 들었다.
“….”
“….”
사진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우리 셋이 있는 공간을 침묵이 잠시 지배했다.
“-뭐야, 이거.”
의문형이었지만, 굳이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에 찍힌 것은 딱히 끔찍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거리를 메운 휘황찬란한 불빛과 기쁨에 찬 행렬. 예쁜 옷을 입고 공연에 몰두하는 사람들, 좌판 가득 쌓여 있는 상품과 예인(藝人)들의 무대. 영락없는 축제 한중간의 모습이었다.
“어제. 로케런에서 촬영된 거야.”
싸늘한 목소리로 아니카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로케런 힐즈. 노스피스의 가장 번화한 도시이자, ‘귀족’들의 도시.
“제발, 오늘만 좀 참아. 황녀님이 이걸 보시면-”
“보면 안 되는 겐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우선 에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직접 볼 순 없지만, 나 역시 얼굴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니카. 대체 무슨 일인가?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 것인가?”
“폐하, 황녀 폐하-”
황녀님은 그녀에게로 다가가 두 손을 감싸 쥐고, 아니카는 그 자리에서 그만 오열하고 만다. 그 옆에 있는 에델은 분노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그저 조용히 떨고만 있다.
“나도 보게 해 주게. 그래야 할 것 같네.”
황녀님은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이미, 절반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알고 계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이 사진을 넘긴다면-
“부탁이네.”
분명 상처받으실 것이다. 그럼에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명령이라서가 아니다. 지금까지 쭉 그랬듯, 황녀님께서는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법과 관계에 묶여 있다고 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고통 받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한편으론 유약하다 여겨지면서도, 너무나 따스해서 그만 우러러보고 마는 상냥함. 그건 지엄한 군주의 명령보다도 훨씬 강하게 내 두 손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
황녀님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사진을 번갈아 넘겨보았다. 먼저 그것을 본 내가 그랬듯, 사진에 우리가 설명을 덧붙일 만한 여백은 없었다.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델.”
“예.”
황녀님은 조용히 아델을 불러 사진을 도로 넘겨주었다.
“이 사진을 파기해 주게.”
“폐하!”
아니카가 고통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저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고, 간결했다. 사도라는 괴물의 침략을 맞아 모든 물자를 아끼고, 민가의 난방용 전기마저 모자라 강녕전을 폐쇄하는 지경까지 간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노스피스의 귀족들은 마치 놀리듯 멀쩡히 신년제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 사진에 찍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도 그다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짐의 잘못이네.”
모두가 고개를 땅으로 떨구었다. 이것은, 반론도 허용되지 않는 명백한 불경이다. 지금껏 황도로 흘러오는 전기를 줄이면서도 노스피스로의 공급을 유지한 건, 옵티머스 팩토리를 비롯한 주요 첨단 기업의 본사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튼이 전장이 되고 황도가 호시탐탐 카르텔에게 노려지는 지금, 이튼에서 대피한 과학자, 기술자들이 안전하게 사도에 대응할 방법을 연구할 수 있는 장소도 그곳이다. 그런데-
“너무나…분합니다…!”
원래라면 그 즉시 대사제가 호출되고 자칫하면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그걸 알고 있고, 그게 무엇보다도 분한 것이다. 거듭된 재앙으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는 지금, 사람들은 서로 돕기는커녕 제 식구, 파벌끼리 뭉쳐 이득을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그것도 모자라 한 나라의 주상을 공개적으로 능멸하며, 그저 자신들의 입지만을 공고히 하려 한다. 그것이 결국 모두가 함께 몰락하는 길이란 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어쩌면 저리도 이기적인 것일까, 어쩌면 저리도
잔혹한 것일까.
“마를렌.”
“예, 폐하.”
조용히 이쪽으로 다가온 그녀에게 황녀 폐하가 물으신다.
“내가-명령을 해도 되겠는가?”
그 목소리는 어느 새 가늘게 떨리고 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는다. 보이지 않는 눈물은, 마음이 흘리는 피다. 아물 새도 없이 계속 벌어진 끝에 고통은 일상이 되어 버린, 상처투성이인 심장이 지르는 비명이다.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누가 거스를 수 있겠는가. 하물며, 피 이상의 것을 나눴다고 여기는 우리가.
“슈나이더 중장을 호출하게.”
그 동안 미루고, 참았던 명령이 결국에는 내려진다. 모든 것은 그 일로 인해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늘의 결정을 두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황녀님을 책망할 것인가. 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을 구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할 것인가.
누군가는 말했다. 지도자라는 이들은 언제나 그 결과로 평가받는다고. 이 모든 게 수습되더라도,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고뇌하고, 망설였는지 알아 줄 이들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다음의 일은 우리에게 그저 악몽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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