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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파 A.C.T.>-여거너 17화

 

 

 

 

17. 돌, 그리고 불

 

 

 

거듭 말하는 거지만, 난 마법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과학에 대해선 필요한 만큼은 알고 있지만, 거기서 벗어나 어느 교실에서도 다루는 일이 없는 기이한 기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거다.

일단 골렘이라는 것이 흙이나 돌을 모아 만든 일종의 로봇 같은 것이란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하겠다. 그리고 그것들은 파괴되고 나면 다시 원래 재료인 흙과 돌로 되돌아간다.

 

…그것까진 좋다 이거야.

 

“반 씨! 저것 좀 어떻게 해볼 수 없어요?!”

“-저게 저렇게도 커지는군요.”

“네. 황궁 정원에도 하나 장식해 두면 괜찮겠네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한참 감상평을 교환하고 있는 두 사람. 아무래도 사태의 심각성은 이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가 않는 모양이다.

지금껏 이 일행이 실컷 만들어 낸 흙과 돌의 잔해.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또 다른 골렘의 ‘재료’로 활용될 수가 있는 것이었다. 뭔가 반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주위를 떠돈다고 느낀 찰나, 온 사방의 잔해들이 스스로 모여 엉키며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형체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소용없어, 저거 영체라고. 형체가 이루어지고 나서 상대하는 수밖에 없어.”

 

감상을 마친 반이 도움 따위 전혀 되지 않는 설명을 내뱉고 나서, 그 거대한 골렘은 마침내 완전한 모양을 갖추었다. 마치 급의 차이를 나타내듯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몸에는 그만큼이나 큼지막한 붉은 보석이 왕관처럼 돋아나 있었다.

 

“오옷, 옵니다. 피하세요 황녀님. 저거 맞으면 죽습니다? 아마.”

“알았어요.”

 

농담에 딴지를 걸 틈도 없이 황금 골렘은 거대한 양 팔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돌격해 왔다. 저거에 맞으면 죽을 거라는 반의 말은, 전혀 농담이 아니겠지.

 

기둥 뒤에 숨지 않는 것은 정답이었다. 적어도 세 사람은 모여야 껴안을 수 있을 굵기의 기둥이 저 팔이 살짝 스치고 지나간 것만으로 막대과자처럼 부서졌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저만큼의 질량을 직격으로 막아낼 만한 엄폐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

“큿!”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녀석의 핵이라고 추정되는 어리 위의 붉은 보석을 노렸다. 크다는 것은 맞추기도 쉽다는 뜻으로 총알은 간단히 보석의 표면에 명중했지만, 보석은 부서지기는커녕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저건 놈의 핵이 아니야. 애써 봐야 소용없어.”

“그럼 이 녀석의 핵은 어디죠?”

“나도 몰라.”

“네?! 당신, 이런 거 잘 아는 것 아니었어요?!”

“기본적인 거밖에 몰라.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무책임한 말과는 달리, 그는 한 손에 검을 단단히 쥔 채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았다.

 

“핵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야. 모르면 나올 때까지 잘게 다져 주면 그만이잖아?”

 

번개가 내리꽂히듯 휘둘러진 일섬(一閃). 거대한 고목과도 같던 팔이 그 일격으로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이얏!”

 

변변한 무기도 없이, 그저 징 박힌 장갑을 낀 손에서 뻗어나간 펀치가 주변에 무수한 파편을 뿌리며 골렘의 몸통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분명 지금까지의 골렘처럼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데미지는 확실히 들어가고 있었다.

 

‘?!’

 

-라고 해서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한 번 붙었던 것이 두 번은 못 붙을쏘냐. 베어지고 부서진 파편은 곧 아까와 같은 아지랑이, 그러니까 영체에 이끌려 도로 있던 자리에 돌아가 합쳐졌다. 물론 다시 붙기 무섭게 도로 떨어져 나가고는 했지만, 원체 크기가 크기였던 만큼 그 속도는 어느 한 쪽이 좀처럼 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래선 끝이 없겠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마법사를 하나 데려왔어야 하나-”

 

반이 투덜거리며 자기 머리 위로 내리치려던 양 팔을 힘차게 베어냈다. 그 얼굴에 지금이 위기라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지만, 역시 귀찮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 영체라는 거, 마법으로는 없앨 수 있는 건가요?”

“어. 근데 너 마법 쓸 수 있어?”

“아뇨. 하지만 방법이 있죠.”

 

그런 거면 진작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 미리 주머니에 한 다발 넣어놓은 은화살이 마침내 빛을 볼 때가 되었다.

 

“먼저 베어내면, 그 부분을 쏘겠습니다!”

 

굳이 대답할 것도 없이 반이 또 한 무더기의 돌흙을 베어 떨어뜨렸다. 이내 영체들이 들끓으며 다시 가 붙으려는 부위에, 미리 마법을 가득 먹여 놓은 은화살이 날아가 폭발한다. 그 위력은 저 두 사람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놈의 상처를 지지는 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이었다.

 

“굿 잡!”

 

회복이 멈춘 골렘을 두 사람이 단숨에 밀어붙인다. 한 층 한 층이 건물 한 채 만큼이나 넓고 높은 이 탑에서 ,머리가 천장에 닿도록 거대한 덩치의 골렘이 겨우 두 명의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광경은 어느덧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오호라, 이거였구나!”

 

말단부터 마치 과일이 베어 먹히듯 떨어져 나가, 흉하게 드러난 골렘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붉은 빛을 내뿜는 보석 하나가 빠끔히 드러나 보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저게 이 녀석의 핵일 터였다.

 

“잠깐, 발슈테드 경. 부수지 마요. 가져가서 조사를 좀 해 봐야겠어요.”

“아, 옙.”

 

그것을 곧장 검으로 꿰뚫으려던 반은 그 말을 듣고는 보석의 바로 옆을 찔러, 꼭 씨를 빼내듯 비틀어 빼냈다. 그와 동시에 핵을 잃은 골렘은 그 덩치가 무색하게도 허무하게 무너져, 원래의 모습인 잔해 무더기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쁘네요-보석함에 넣기에는 좀 크지만요.”

 

이자벨라 황녀는 튕겨 나온 보석을 주워 탑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로 자세히 비춰 보았다. 저것도 마법에 관계된 것인지, 굴절된 햇빛과 더불어 돌 내부에서도 새어나오는 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쉽사리 눈을 떼기 힘든 찬란한 빛이 발해지고 있었다.

 

“자, 관찰하는 건 그만 내려가서 하시죠.”

 

무너진 잔해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반이 이자벨라 쪽으로 다가왔다. 말은 그만 내려가자고 하고 있지만, 그 역시 보석의 광채에는 상당히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돈과 관련된 욕심과는 다른,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거겠지.

 

‘?’

 

그 때, 시야 저 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오히려 발견하지 못하는 게 더 힘든 덩치 큰 적만을 상대했기 때문일까, 저 자그마한 존재는 이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아래에서 처리했던 인형사와 같은 작달막한 난장이. 이전처럼 둥둥 떠다니는 바위도 타고 있지 않기에, 오히려 더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손에는 그 때와는 다른,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무기가 들려 있었다.

 

“위험합니다!”

 

오랜 기간 연마해 온 반사 신경이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보다도 앞서 몸을 움직였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이자벨라 황녀를 가까스로 몸을 날려 쓰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등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아픔이 날아와 박혔다.

 

“으으윽…!”

 

문자 그대로 등이 꿰뚫리는 고통에 참지 못하고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이자벨라의 얼굴엔 싸울 때의 모습으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순수한 당혹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뒤에서는 마찬가지로, 하지만 동시에 뒤를 노려졌다는 분노로 가득 찬 반의 외침이 들렸다.

 

“이 자식이!”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난쟁이가 희미한 비명을 지르며 숨이 끊어졌다. 결과적으로 이게 잘 해결된 거겠지. 황녀…는 무사히 지켜냈고, 나는 적어도 죽진 않았다. 아마…아닐 거다. 올라오기 전에 마신 약이 반은 마취약이라고 했던가? 극심한 고통에 뇌에서 아예 신호를 끊으려는 듯 의식이 빠르게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여기로 내려와 대체 몇 번이나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ㄴㅕ ㅁ….

 

-

 

이번엔 꿈 따위는 꾸지 않았다. 몸만 잠들어 있는 반쪽짜리 잠 속에서 가끔씩 차갑고 절제된 고통이 의식을 현실의 표면으로 되돌렸다.

 

“반드시 살리도록 하세요. 그녀는

 

 

“필요한 건 전부 끝냈어요. 이젠…”

 

 

“휴우, 참 대단하게도 날뛰고 다니셨군…”

 

 

누워 있는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는 날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갔다.

 

“흐음, 이 녀석이 그랬다고?”

 

드디어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은, 의외로 두 명의 제국 기사들이었다.

 

“아! 지금 일어났어, 레니!”

“윽, 난 이만-”

“어딜 가 이 기지배야!”

 

분명 피오나라는 이름이었던 흰 단발의 기사와, 방금 레니라고 불린 붉은 머리의 기사. 그 중 레니는 내가 일어나려던 것을 보고 황급히 자리를 뜨려 했던 모습이다. 지금은 피오나에게 뒷덜미를 잡혀, 쭈뼛거리며 내 앞에 앉아 있다.

 

“몸은 이제 괜찮아?”

 

피오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조금 피곤하긴 하다. 잔다고는 해도 반쯤은 깨어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어디 내가 마음 놓고 푹 잘 수 있는 형편이었던가. 적어도 몸 한정으로는 이제 불편한 곳은 하나도 없다. 누구 덕인지는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

“야, 얼른!”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앉아 있는 레니의 어깨를 피오나가 툭 하고 떠민다.

 

“?”

“미…”

 

그야말로 기어 들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연다.

 

“미안해.”

“…에?”

 

갑자기 튀어나온 영문 모를 사과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피오나는 한숨을 쉬고는,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처음에 황녀님을 지키러 가야 한다고 떼를 쓴 게 이 녀석이거든. 그런 주제에 자기는 초입부터 돌덩이에 얻어맞아 뻗고, 다들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으웅.”

 

피오나에게 머리를 쥐어 박힌 레니가 작게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었다.

 

“황녀님보다 약한 주제에 나대지 말라고 내가 그랬어, 안 그랬어? 이놈의 기집애! 한 대 더 맞아라!”

 

말은 험하지만, 명확히 장난으로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은 어떻게 보아도 굉장히 사이가 좋아 보였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기사라는 신분만 아니면, 그저 평범한 어염집의 아가씨들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너도 뭐라고 좀 해! 죽다 살아나서 이틀씩이나 누워 있던 게 다 이 녀석 탓이라니까!”

“에-”

“으으, 미안, 하다니까.”

 

한창 온화한 분위기에 미안하지만, 뭔가 굉장한 사실을 들어버린 것 같았다.

 

“이, 이틀?!”

“말 안 했던가? 상처는 그 아가씨가 금방 고쳤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거든. 네가 단장님한테 업혀 내려왔을 땐, 무슨 흡혈귀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힘없이 풀려 있는 허리와 다리 탓에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말로 난, 여기 누워서 이틀을 그대로 허비하고 만 건가?

 

“뭐 해! 너 아직 환자라고! 얌전히 누워 있어!”

“하지만, 하지만-”

 

황망해진 정신 탓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머리에 피가 올라 쓰러질 것만 같았다. 지금 이러는 순간에도 황도에선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텐데, 나라는 것은-

 

“에잇, 안 되겠어. 레니, 너도 와서 얘 좀 붙들어!”

 

결국 나는 두 사람의 손에 붙들려, 억지로 다시 침대 위에 눕혀지는 꼴이 되었다. 어떻게든 몸부림을 치려던 나를 두 사람은 마치 어린 아이를 다루듯 가볍게 제압했다. 내가 이토록 나약해졌구나. 라는 생각에 더더욱 울적한 기분이 밀려오고 있었다.

 

“-미안한데, 너 진짜로 이상한 거 알아? 모험가라면서 황녀님이란 말에 갑자기 맹목적이 되고, 뭔가 엄청나게 서두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말 좀 해 줘. 분명 뭔가 사정이 있는 거지?”

 

가까스로 상황을 진정시키고 나서,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피오나가 물었다. 가까스로 발작을 멈춘 양 손은 여전히 불안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말대로 지금 여길 뛰쳐나간다고 해서 뾰족하게 일이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이대로 정체를 숨기고, 목적을 숨기고 다녀서는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나는 다시 내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저 위에서의 내 신분은 지금의 그녀들과 상당히 비슷했다. 단지 내가 모시는 황녀님은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고, 나는 결국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그 정도의 차이.

 

“저는…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미안해. 괴로운 얘기를 하게 했네.”

 

상당히 침울해져 버린 분위기에서 피오나가 나에게 다시 사과했다. 레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들어 있었다.

 

“하지만 잘 얘기해 줬어. 지금 아라드에서 천계까지 원정을 나갈 만한 국력이 있는 나라는 데 로스 제국뿐이야. 일이 잘 풀리면 우리도 꼭 가서 도와줄게. 알았지?”

“네…고마워요.”

 

떨리는 내 손을 꼭 감싼 그녀의 온기를 더없이 감사하게 느끼며 나는 억지로라도 힘껏 지은 웃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여깁니다.”

 

그 때, 내가 누운 병실 밖에서 몇 사람이 함께 걸어오는 작은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중 둘 이상은 내가 이미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요, 안녕? 그새 다 나았나 보네?”

 

그 중 한 명은 지금까지 내 곁을 지키던 그녀들의 상관, 반 발슈테드. 이번에도 역시 진지함이 아주 희박하게 느껴지는 태도이다.

 

“다행이네요. 이쪽에 가족이 없으면, 죽어도 보상을 받을 수 없다고요.”

“-황녀님은 지금 걱정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피오나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뭐 그러지 않아도 이자벨라 황녀가 나쁜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님은 잘 알고 있다. 노스피스의 흔해 빠진 귀족들이 그러듯,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기색이 그녀에게선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안녕, 요즘 핫하신 신입 모험가님.”

 

거기에 동행한 두 사람은 상당히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우선 요전에 상당히 신세를 졌던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카라카스 씨. 부디 이쪽을 아는 척 해 달라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제법 큰 상자를 손에 들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래도 처음 보는 사람이다. 지금껏 보아 온 사람들이 유난히 훤칠했던 탓일까, 중간 정도의 키에 서예용 붓 같은 콧수염, 헐렁한 로브 너머로도 알 수 있는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도록 했다.

 

“…정말 괜찮은가? 분명 ‘절대안정’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요. 게다가 이게 뭔지 알면, 여기서는 절대 안정 못 할 걸요?”

 

병실 한쪽에 상자를 내려놓고 나서, 배불뚝이 아저씨는 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달라는 듯 이자벨라 황녀 쪽을 바라보았다.

 

“우선 소개할게요. 이 분은 헨돈 마이어 연금술사 길드의 장, 로톤 막시머그 님이세요.”

 

첫인상에 비해 상당히 인상적인 직책을 가지고 있는 아저씨였다. 잘 보면 두르고 있는 로브도 멋으로만 입고 다니는 건 아닌 듯, 몇 번이나 빤 흔적이 있는 약품의 얼룩이나 탄 자국 등이 옷에 희미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금술이라고 하면 생소하겠지? 적당히 설명하자면-”

“-‘과학’과 비슷한 것인가요?”

“과학! 그래! 그렇지. 이거 보기 드문 말을 아는 젊은이로구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름 아닌 천계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과 상당히 흡사했기에 튀어나온 말이지만, 로톤 씨는 그 말에 격하게 반가워하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무래도 마법이라는 원리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과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건 상당히 고달픈 일인 모양이다.

 

“뭐 이렇게 서로 잡담이나 하는 것도 좋지만, 황녀님. 이제 슬슬 상황을 정리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카라카스 씨의 말에 이자벨라 황녀는 잠깐 헛기침을 해 주의를 끌고는, 내가 누워 있던 동안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당신도 모험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니까, 여기의 모험가 길드의 사람과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러니까-거기서 당신이 꽤 용감한 행동을 한 것 때문에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녀는 ‘보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곳 아라드에서 나와 연고가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가까이 지내는 세리아 양도 그저 만난 지 며칠 되었을 뿐이고, 키리 씨는 사실 동향 사람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결국 내 소속이라고 할 만한 모험가 길드로 간 건 올바른 판단이겠지.

 

“저는 무슨 보상을 바라고-”

“마음은 고맙지만, 제국의 황녀로서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네요. 은혜든 원수든, 받은 것은 반드시 갚는 게 우리 방식이거든요. 적어도 아버지께선 그렇게 가르치셨죠.”

 

그래서, 라고 덧붙이며 그녀는 잠시 옆으로 치워 놓았던 상자를 가리켰다. 아마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 그 상자를 열고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낸 것은 옆에 서 있던 로톤 씨였다.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자네의 무용담은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었어. 아마 자네도 들으면 알 이름들일 거야.”

“솔직히 믿기 어려웠어요. 매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한 전투에, 자살이나 다름없는 특공…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거라고요.”

 

카라카스 씨와 이자벨라는 그렇게 밝지는 않은 목소리로 지난 모험 동안의 내 모습을 평가했다. 거기에 반박의 여지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침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충분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건….”

“뭐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받아들일 만하면서, 앞으로 살아남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이번 일의 보상으로 준비했어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로톤 씨가 상자에서 꺼낸 물건을 나에게 건넸다. 상자의 크기에 비해 그렇게 큰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양은, 정말 놀랍게도 나에게 더없이 익숙한 물건의 형태였다.

 

“자네도 천계인이라고 해서, 디자인은 키리 양에게 도움을 좀 받았지.”

구성 자체는 단순하다. 겉 부분에 판금이 덧대어진 벨트와 마찬가지로 보강된 외장이 붙은 상자형 기기. 일단 둘 다 꽤나 거친 환경에서 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겠다.

 

“기초 원리에 대한 것은 내가 쓴 <4대 기초원소의 이온환원과 회로고착> 논문을 참고하게…뭐 읽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로톤 씨가 상자형 기기를 손에 들고 조작하자, 가운데 부분이 빠끔히 벌어지며 위로 자그마한 홀로그램 같은 것이 출력되었다.

 

“우선 소개하지. 연금학의 정수가 담긴 전술 지원용 휴대형 공방. <수다쟁이>마크 1이라네.”

 

기기 위로 떠오른 홀로그램에는 빨강과 파랑, 흰색과 검은색의 네 가지 색이 마치 무언가의 상징처럼 떠올라 있다. 로톤 씨가 거기에 손을 넣어 옷을 펼치듯 펼치자, 홀로그램은 마치 작업대처럼 넓게 펼쳐져 여러 가지 도구와 장치들이 빛의 형상으로 구현되었다.

 

“전에 키리 양이 사격과 마법을 조합하겠다고 맡겨 놓은 아이디어를 급하게 완성시켰지.”

 

로톤 씨가 아마 그녀에게서 받아 왔을 권총탄을 펼쳐진 장비들 중 하나에 투입했다. 그리고 장치의 다른 투입구에는 준비해 온 네 가지 큐브 조각들 중 하나를 투입했다. 그 모습은, 내가 최근에 보았던 어떤 인물의 장치와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혹시 이거-”

“아, 알아봤군. 이걸 만드는 데에 참 여러 사람의 손이 거쳐 갔네. 다프네 양이 고용주 없이 왔다간 것도 참 드문 일이었지.”

 

공정이 끝나고, 그는 이번에는 표면에서 은은한 붉은 인광이 어른거리는 탄환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거지.”

 

만들어낸 총알이며 여러 가지를 작업대 위에 어지럽게 늘어놓은 상태에서, 그는 이번엔 반대로 양 손을 뭔가를 구기듯이 당겼다. 그러자 빛으로 구현된 작업대는 물론이고, 분명히 형체가 있었던 탄약들까지 함께 쪼그라들어 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기서 만든 모든 것들은 내부에 원소 입자의 형태로 보관되고, 언제든 꺼내 사용할 수 있지. 한마디로 마법의 가방이란 말씀이야. 이런 걸 전에 본 적이 있나?”

“그럴 리가요….”

 

어찌 보면 내가 내려와서 보았던 것 중 가장 마법 같은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총을 다루는 자가 항상 부딪치게 마련인 탄약의 휴대와 보급이라는 문제가 이 발명품 하나로 마치 장난처럼 해결이 되는 것이었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네. 이론은 전부터 세워져 있었네만, 알맞은 소재를 이 아라드에선 찾을 수 없던 참이었고. 마침 이 사람들이 정확히 찾던 것을 들고 나타난 건 기막힌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로톤 님의 논문은 개인적으로 입수해서 읽고 있어요. 제국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꽉 막혀 사는 건 아니라고요.”

“다른 녀석들도 그만큼만 했으면 또 어땠겠냐만, 뭐 하여튼”

 

거의 과분하다 싶은 선물을 받고 얼이 빠져 있는 나에게 로톤 씨가 말을 이었다.

 

“제작에 든 경비는 모두 여기 있는 이자벨라 황녀가 부담하기로 했네. 듣자 하니 목숨을 구해 준 보답이라고 하던데.”

“네. 이 정도라면, 앞으로 무모하게 싸우다가 죽는 일을 꽤 어려워지겠죠?”

“그럴까요? 뭐 어쨌든 너도 황녀님의 총애를 얻었다는 거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거기까지 말을 하고 반과 이자벨라 황녀는 병실을 나갔다. 거기에 더해 피오나와 레니도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뒤를 따랐다. 이제 방 안에는 나와 모험가 길드장, 그리고 로톤 씨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나저나 제가 가장 신기한 건 그거네요. 제국이 싫어서 도망 나온 연금술사가 제국 황녀의 부탁을 받아 이런 일을 맡다니.”

“물론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나한데 중요한 건 예나 지금이나 자유로운 연구니까 말일세.”

 

게다가, 라고 로톤 씨가 나를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은 자네 때문이기도 하네. 저들도 거듭 말하긴 했지만, 그런 방식은 너무 무모해. 자네가 이루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대로는 도중에 어이없이 죽을 게 뻔해. 이걸로 상황은 좀 나아지겠지만, 언제나 명심하게. 이 세상에 목숨과 맞바꿔도 되는 건 아주 적어. 살아있어야만 뭐든 할 수가 있다고.”

“명심하겠습니다.”

 

그와, 더불어 날 걱정해 주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선물을 품에 꼭 안았다.

 

“원했든 아니든, 지금 자네는 이 근방에서 어마어마한 주목을 끌고 있어. 이걸 피해 다닐지, 아니면 유리하게 이용할지는 그 쪽의 몫이라고?”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들이 무슨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껏 내가 수도 없이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 밖에 꺼내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것은. 같잖은 자존심? 근거 없는 불신? 아니면 배신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도와주세요.”

 

결국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동료를 모아야만 한다. 이 생소하고, 나름대로 위험하기까지 한 이 대륙에서 결국 나는 끝까지 곁에 있어 줄 사람들을 찾아야만 한다. 그게 나중에 어떤 결과로 돌아오든 간에, 지금이 선택을 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언제 그 말 하나 했네.”

 

나와는 정 반대로 그야말로 시원스럽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나름대로 스스로의 이익을 위한 계산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 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저 순수한 친절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방인이 자신들 세계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은 나의 ‘모험’이 성공, 혹은 실패로 끝날지 무엇 하나 확실치 않은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붙들 만한 한 줄기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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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v100
  • 델리가없져
  • 진(眞) 미스트리스 바칼

    모험단Lv.37 깊은산속오두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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