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ngeon & Fighter

창작콘텐츠

UCC

소설

여견폐간 - 솔도로스와 양얼의 이야기

  • 지세 바칼
  • 2020.06.10 00:44 2,681

플롯을 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

 

영웅담으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강자들이라 하더라도 따라붙는 이야기와 전설, 음유시인들이 그의 불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태양이 뜨는 곳의 끝에서 대륙 전체로 이름을 날린 솔도로스는 어느날부턴가 홀연히 사라졌다. 음유시인과 문학가들은 수많은 검을 쥐고 있는 그의 마지막을 상상해 퍼뜨리거나 혹은 또다른 세계로의 모험을 떠났다며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 들었다.

양얼은 솔도로스를 기리던 노래가 구전으로 전해져 한껏 과장되고 왜곡될 때 쯤에야 태어났다. 사실 과장이 아니라 축소에 가까웠다. 솔도로스는 실제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검사였고, 전설은 사실성과 흥미를 덧붙이기 위해서 그의 고난과 역경을 지어내야 했으니. 한껏 부풀린 말은 승리에서만 사실이었고 그가 겪은 고난의 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양얼은 화려한 도시가 아닌 목가적인 외곽의 시골에서 자라났으나 그 곳에서도 전설은 유효했다. 아이들은 모여서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노랫말 속의 전설을 재현하려는 놀이를 하고는 했다. 양얼도 그중에 끼어 있는 일이 잦았다.

수도인 쇼난에서 꽤 멀찍한 거리에 있는 마을에서 양얼은 꽤 낙천적인 아이로 자라났다.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를 한데 묶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는 수쥬의 거리를 쏘다녔다. 평범한 농가의 일원이었던 양얼의 부모들은 후에 전설에 버금가는 검사로 자라날 아이에게 조기교육을 시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들이 하는 대로 학당에 보내고, 점점 험난해지는 세상을 이겨내고 정신이라도 닦으라고 검술 도장에 보냈을 뿐이다.

재능은 꼭 물려받는 것만이 아닌 모양인지, 양얼은 학당에서는 평균보다 못한 정도의 성취를 보였지만 검술에 있어서는 마을에서 꽤 괜찮은 능력을 보였다. 낙제를 하지 않는 정도로만. 이렇게 보면 그저 그런, 남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아이로 볼 수 있었겠으나 양얼은 낙천적인 게으름에 있어서 정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학당에도, 검술 도장에도 일주일에 한 번 코빼기를 비치는가 하면 금세 내빼서는 언덕 위에 올라가 느긋하게 햇살을 쬐며 풀을 씹는 것이다. 그런 노력의 투입 정도를 생각해 본다면 양얼은 거의 초인적인 효율을 내고 있는 편이었다. 그 꼬마는 정말로 꼬마답지 않게 게을렀다. 부모가 항상 뭐가 되려고 그러냐며 닦달을 하면 양얼은 씹던 풀을 손에 쥐고 어깨를 으쓱이며 특유의 느긋하고 해사한 웃음을 보여줬다. 마을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학당을 농땡이치고 정자에 앉아서 어르신들의 장기를 구경하거나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는 양얼은 다른 건 몰라도 원한을 사서 죽지는 않을 것 같은 어린이였다. 도장의 스승도 단단히 혼을 내려고 그를 부르면 맹하게 고개를 푹 떨구면 분노를 어물어물 누를 수 밖에 없었으니까.

양얼의 어머니는 그 때 집에서 동네 개와 노닥거리고 있는 아들을 불러다 앉히고 물었다.

"네 스승께서 네가 검술에 능하다 하시더구나."

그 현명한 여성은 아들에게 말하는 것임을 감안해서 '네가'와 '검술에'' 사이에 '그나마'라는 단어를 일부러 제외시켰다.

"헤헤."

소년이 옷에 노랗고 하얀 개털을 덕지덕지 묻히고 꿇어앉아서는 머쓱하게 웃었다.

"검은 올바른 곳을 향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올바른 급소를 찔러야 적이 쓰러진단 말씀이실까요?"

"그 말도 맞다."

정답이 더 있다는 말이었다. 양얼은 다른 답들을 더 내어놓는 대신에 그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소년답게 홍조가 오른 뺨에 의문이 덧씌워진다. 좀처럼 자신을 불러다가 이렇게 진지한 말을 한 적이 없는 모친이기에 자세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도로록 굴러가는 눈은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자세는 일단은 얌전하지만 언제든지 놀러 튀어나갈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검술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다. 아무 곳에도 사용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세상이 이러니 가장 필요한 것이 검술이기도 하지. 검은 '적'을 향해야 한다. 지금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이해할 때가 올 거야. 항상 무기를 삿되이 휘두르지 말고, 사려깊고 신중하게 생각해라. 알겠니?"

소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번개처럼 머리에 스친 의문을 곧바로 입밖에 냈다.

"전설의 검사들도 그랬을까요?"

"음?"

"솔도로스가 위명을 떨칠 때에는 길가에 도둑이 없다고 했어요. 무와 의를 아는 자라면 항상 올바른 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겠죠?"

어린아이의 물음은 본질을 벗어난 것이었으나 모친은 아이의 믿음을 굳이 해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러니 글공부도 게을리 하지 마라. 칼이 아무리 날카롭고 단단하다 한들, 잘못 쓰인다면 그보다 악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꿇어앉은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해 몸을 이리저리 꼬는 것을 본 양얼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이제 나가 놀라며 사탕을 쥐어주고 손을 저었다. 양얼은 사탕을 쥐고 일어나 언덕을 향해 내달렸다. 바람이 시원하게 볼을 간질이고 숨이 차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논이 넓게 펼쳐진 곳에서 뜀박질을 하다 보면 여름철에 풀을 베는 주민들이 어딜 그렇게 가느냐고 묻고는 했다. 양얼은 거주지와 논밭을 지나 외곽까지 달려서, 마을 전체가 보이는 탁 트인 언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드러누웠다. 마을은 평화롭고 전설의 검사가 지킬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구름은 느리게 흘러갔고, 햇살이 따뜻해 양얼은 입 안에서 단 사탕을 굴리다가 잠이 들었다. 부모가 들으면 큰일이 날 행동이었지만 언덕은 높고 마을은 평화로워, 붉은 융단이 하늘에 깔릴 때 쯤에야 일어나 침을 닦았다. 양얼은 터벅터벅 마을로 돌아가는 걸음을 옮겼다. 오는 길을 짚어 돌아가는 길에 보이던 어른들은 어디에도 없다. 해가 질 때 쯤이면 모두 돌아가 저녁을 맞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양얼의 눈에 죽은 개의 시체가 보였다. 무언가에 베어 먹힌 모양으로 반밖에 남지 않은 형체.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쓰다듬고 있었던 강아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그는 마을을 다시 응시한다. 하늘을 향하는 연기는 밥을 짓는 것 같은 소소한 규모가 아니다. 양얼은 집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일상은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흘러갈 것 같았지만 재앙에는 그 어떤 예고도, 자비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부모도, 친구도, 어른들도, 아이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강하거나 약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연으로 재앙에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양얼은 대장간에서 쇠붙이를 쥐었다.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현실감이 나지 않았고,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계속 곱씹어도 아득하게 멀다. 검이 올바른 곳을 향해야 한다. 양얼이 보기에는 검이 향해야 할 곳이 응당 자신처럼 보였다.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단번에 끝내는 방법. 검에 목이 그인다. 여린 피부를 따갑게 가른 곳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양얼은 끝까지 실행하지 못했다. 시체와 피비린내 사이에서 검을 끌어안고 땅을 긁었다. 뱃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와 비명과 같은 것들을 토해낸다. 괴수들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시체와 피비린내, 그리고 쥐고 있는 검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오열하던 소년이 주린 배를 쥐었다.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절망과 비통함 속에서도 삶은 찾아온다. 배는 고프고 울어댄 탓에 머리가 아팠으며 목이 탔다.

소년이 검을 쥐고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며 우물을 찾아 목을 축였다. 비린 맛이 났다. 그럼에도 죽을 수 없다면 살아남아야 했다.

 

*

 

소문의 '신검'이 무기점에 후드를 쓰고 들러 부러진 칼자루의 수리를 부탁했다. 대장장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두질한 가죽을 나무에 두르고 손잡이를 붙였다. 벌써 세 번째다. 양얼이 입술을 씹었다. '신검'이 의적질을 한다는 소식에 겁을 집어 먹은 지방 토호가 보낸 자객이 한 번-양얼은 결코 의적질을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짐을 모조리 뺏고 죽이려는 도적단이 한 번, 신검을 죽여 그 드높은 이름을 빼앗겠다는 무지렁이가 한 번. 입속이 터져 부었다. 수가 많았으나 주동자가 아닌 이를 살리려 하지 않고 모조리 죽였더라면 입가가 터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삶을 그리도 가벼이 여기는 불나방들에게 그래도 선별적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곁에서 폼멜을 멋있는 것으로 바꿔 달라는 검사가 양얼을 힐끗 쳐다보았다. 신검은 고개를 숙였다.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또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른 것 같다. 다갈색의 머리를 한 주근깨 가득한 청년이 그를 힐끗거리고 있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거 다 싸우다 다친 건가?"

양얼은 말없이 붕대를 풀고 소매를 걷어 흉터를 보여주었다. 전투의 상처를 과시하고픈 생각이 아니라, 그저 계속 귀찮게 굴어 결국 확인할 것이 뻔하므로 사전에 일을 해결해 질문을 막기 위해서였다. 팔에 이어진 자상들을 살펴보던 행인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 이름은 스미스야."

출신을 명확히 특정지을 수 없는 데다가 흔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친밀감을 표시하는 남자는 호감이 가는 얼굴로 웃었다.

"아까 도적단이랑 싸우는 걸 봤어. 도와주지 못한 건 미안해. 아직 약해서…. 엄청 잘하던데. 나는 북부로 가는 중인데 혹시 가는 곳이 같으면 동행을 부탁할 수 있을까? 네가 더 강하니까, 당연히 돈은 지불…."

"돈은 필요 없어."

스미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양얼은 자신이 너무나 오래 말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인가?"

"길이 똑같으니."

스미스가 헤벌쭉 웃었다. 양얼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기분이 곧 침침해졌다. 그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신변잡기에 대해 떠벌렸다. 정말 대단하다느니, 이름이 뭐냐느니, 수쥬에서 온 것 같은데 자신은 공국 서부에 살고 있고, 뭐 그런 얘기들을 쉴새없이 재잘거렸다.

"무도가에 어울리는 기질은 아니군."

"말 많다고 뭐라 하는 거야?"

양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단의 습격이나 괴수의 출현은 없었다. 숲은 필요 이상으로 고요했다. 해가 질 때 쯤에 걸음을 멈추고 잠자리를 만든다. 양얼은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스미스가 장작을 모으고 물을 머금은 나무 위에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꺼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떠드는 것은 덤이었다.

"늑대가 모여들지도 모르니까 조용히 좀 해."

"그건 좀 무서운데. 네가 지켜주겠지."

모닥불이 남자의 얼굴을 밝힌다. 불이 주는 온기는 마음에도 옮겨붙는 착각이 든다. 자신이 불침번을 먼저 설테니 자라는 말을 반발 없이 받아들여 양얼은 순순히 눈을 감는다.

양얼은 마을에서 떠나온 날 이후로 편히 잠에 들어본 날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날도 어김이 없었다. 좋지 않은 기억들은 언제나 선명하다. 반으로 갈라져 있던 동물의 사체, 피비린내, 죽음, 알던 얼굴들, 우물에서 느껴진 비릿함. 신체에 칼자국이 새겨지고 이름이 드높아지는 동안에도 기억은 검술로 베어낼 수 없었다. 번뜩이며 내부를 무너뜨린다. 생생한 죽음과 절망의 감각.

옆으로 굴러 예기를 피한다. 심장이 조여든 느낌에 양얼이 시야를 되찾는다.

"쳇. 꼴에 신검이다 이거야?"

스미스가 양얼이 누워 있던 곳에 박힌 칼을 뽑아내고 재차 휘두른다. 형편없는 실력에 기습까지 실패했으니 '신검'이 틈을 용납할 리가 없다. 크게 휘두르는 동작 옆을 파고들어 명치를 친다. 컥컥거리며 부여잡는 그의 다리를 걷어차 쓰러뜨리고, 칼을 빼앗아 목에 댄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왜지?"

"왜긴, 네 목을 가져가면 값을 치를 나리들이 한가득이야."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을 텐데."

"넌 강하니까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런 기회가 없었으면 내가 이름을 날릴 순간이 오긴 하겠어? 죽여, 그냥."

검은 올바른 곳을 향해야 한다. 타인의 검은 그렇지 않다. 항상 덧없는 명예와 성취에 이끌려 타인을 너무도 쉽게 해하려 하는 것이다. 양얼은 노려보는 갈색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의 말대로 했다. 피가 튀었다.

끝도 없이 죽음을 몰고 다녀도 익숙해지기는 힘든 감각이다.

 

*

 

술이 절실하게 필요한 하루였다. 네 번이다. 네 번. 신체가 지치는 것도 문제지만 항상 이럴 때 찾아오는 것은 정신적 피로다. 세상에 대한 믿음을 애저녁에 버린지 오래라고 생각해도, 아직 젊은 남자의 마음 속에 늘어난 쐐기는 아릿함을 전한다. 주점에 들어가 바 테이블에서 술을 주문하니 곁에 앉은 노인이 아는 척을 했다.

"지친 얼굴을 하고 있군. 젊은이가 말이야."

양얼은 자신을 부른 목소리에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노인이 곁에 제쳐 놓은 짐에서 검들이 삐죽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겉멋에 찌든 무사이거나, 돌아다니는 무기상이거나.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가 두른 기운은 넨에 능통하지 않은 양얼이라도 눈치챌 수 있도록 무시무시하게 공간 전체에 펼쳐져 있었다. 양얼은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을 뻗어 쥐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 광경을 본 노인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저 대화나 좀 하자는 거지. 주점에서 처음 만난 젊은이에게 칼을 휘두르는 취미는 없네."

"무슨 일이시기에?"

"말했지 않나. 그저 대화를 좀 하기 위해서라고. 하도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길래 무슨 일이 있는가 궁금할 뿐이네."

"실례지만, 노인장께선 어떤 분이시길래 저에게 말을 물으십니까?"

"아, 그건 밝힐 수 없네. 항상 말을 하면 문제가 생겼거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줄줄 털어놓을 말은 없습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이키며 양얼이 고개를 돌렸다. 도수가 높은 주점의 술이 목을 타고 흐르면서 뜨거운 흔적을 남겼다.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것은 비단 술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인간과 말을 섞으면, 필연적으로 연이 되고, 그 끝에는 결국 파멸이 있었다. 배신하지 않는 동료라 해도, 언젠가는 서로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방랑 검사의 삶이 그러했다. 정착과 연결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 그거 참 안됐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깨 펴고 당당하게 다니게. 세상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리려는 태도는 실제로 적을 만들기도 하니까."

"상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바 테이블 너머에는 모험가들이 모여서는 떠들썩한 분위기로 저마다 지껄여댄다. 의기투합하는 목소리, 앞으로도 잘 해보자는 뜻을 전하는 활기. 양얼은 남은 술을 털어넣듯이 단숨에 마시고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거의 북부의 전사들이나 쓸 법한 나무통 잔에 술이 담겨 나왔다. 입이 쓰고 속이 탔다. 가족과 터전을 잃고, 살아남고자 버둥거렸으나 남은 것은 손에 쥔 나무와 쇠의 결합물들 뿐이고 헛된 이름 뿐이다. 자신을 더욱더 고립시키는, 원하지 않는 이름.

"동료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 보아하니 꽤 강한 검사인 것 같은데, 뒤를 봐주는 동료의 존재는 갈고닦은 실력보다도 더 빛날 때가 있는 법이라네. 젊은이."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방금 그 동료에게 짐과 목숨을 빼앗길 뻔 한 참이라 와닿지 않는군요."

"허허. 그래서 울상을 하고 있던 겐가."

이번에는 노인장이 술을 쭉 들이켰다. 취기가 막 올라온 터라 겨우 입을 연 양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말에 대한 미약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자네는 어디를 향해 검을 휘두르나?"

"예?"

"나는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휘둘렀지. 그 뒤엔 강자들을 찾아다녔네. 검을 맞대고, 생사를 가르는 그 순간이 황홀할 정도였다네. 그렇게 베고, 쓰러뜨리고, 베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 젊었을 적의 혈기였고, 지금은 노회했지. 하지만 아직도 강자들과 검을 맞댈 때면 피가 끓어 올라.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야."

"무슨…."

"연단된 칼날은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 자네는 연단된 칼이 되어 누군가에게 휘둘러지고자 하는가? 아니면, 직접 휘둘러 올바른 곳을 향하는 자가 될 텐가."

젊었을 때에 대한 회상이었던 말은 은유를 뒤섞어 양얼에게 향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이 술에 잠긴 머릿속의 밑에 침잠해 있다가 떠올라 양얼을 찌른다. 강해지고 싶어 몸부림치고, 강자가 되고자 생사를 넘나들며 얻은 이름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호한 말은 피로에 찌든 양얼의 육신을 뒤흔들었다. 대답을 꺼리고 굳어 있는 젊은이를 지켜보던 노인이 짐을 챙겨 들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을 빼고 격려의 동작을 보인 것 뿐임에도 내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어깨 위로 얹힌다. 양얼은 눈을 올려 노인장과 시선을 맞춘다. 형형한 마음의 창에서는 한점 어그러짐 없는 빛이 쏟아졌다.

"대화는 즐거웠네. 잠시 내려왔던 것이라 돌아가야 하거든. 참, 대화가 아니라 검을 주고 받았더라면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드는군."

돌아간다. 어디로? 노인의 말 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양얼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짐을 멘 노인의 등 뒤로 천이 흘러내려 가려져 있던 무구가 보였다. 칼이 이리저리 꽂혀 있는, 뼈로 만든 요정 시대의 무구.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얼은 고개를 살짝 저어 상념을 털어낸다. 술이 과했던 모양이다. 실은 전혀 과하지 않은 양이었는데도 억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귓가에 노인이 잊을 수 없는 말을 속삭인다.

"신검을 만나 영광이었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훌쩍 떠났다. 잠시 멍하니 있던 양얼이 곧바로 테이블에 값을 치른 뒤에 그를 쫓았다.

"잠깐, 잠깐만요!"

손을 뻗지만 홀연히 사라진 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미 찾아볼 수 없다. 양얼은 전설을 떠올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설은 실현될 수 없는 일이어서 전설이었다. 양얼은 사라진 그가 있는 거리에서 주점으로 다시 돌아가 자신의 짐을 챙겼다.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노인이 던진 질문에 휘몰아친 상념과 내면의 혼란이 정리된 것을 깨닫는다. 강해져야 할 이유는 명확하다. 신검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휘둘러질 것인가. 올바른 곳을 향해 휘두를 것인가. 일견 당연한 물음에 양얼은 답을 찾는 걸음을 빨리 한다.

 

*

 

검은 로브를 쓴 여성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먼 곳에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검사에게 나직이 말했다.

"신검."

허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틀림없이 귀에 닿았다. 양얼은 이제는 익숙해진 호칭을 받아들여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여성은 양얼이 자아낸 바람에 펄럭이는 로브를 살짝 부여잡으며 말을 잇는다.

"여로의 끝엔 무엇이 있기에 그리 방황하십니까?"

"길이 곧 답이었지요."

안정된 기운은 말투에도 배어들었는지 느긋하다.

"강자들과의 대결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여부가 있겠어요."

양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길은 찾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었다.

 

*

 

탑은 높았다. 금발의 거너, 강화인간, 선인과 악인, 모두를 거쳐 올라온 양얼은 꼭대기의 문을 앞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문 앞에 내려둔 뒤, 허리춤에 찬 검을 잡는다.

미뤄두었던 '대화'를 할 시간이었다. 가슴이 터질듯이 벅차오르고, 대조적으로 머리는 혼란을 밀어내고 깨끗이 비워진다. 전투를 앞둔 근육은 각자가 심장을 가진 듯이 두근거렸다. 천 마디 말보다 더 한 것들을 나눌 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문을 연다. 수도 없이 상상을 반복했던 그 광경이다. 노랫말 속에 있던 바로 그 무기들, 전설과 이야기가 법칙을 뛰어넘어 새로운 장을 펼치고 있다. 

"왔나? 한 수 부탁드리네!"

 

4
!
  • Lv25
  • 지세
  • 여넨마스터 바칼

    모험단Lv.1 allinstar

일부 아바타는 게임과 다르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