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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 - 4

 

 

 

 

 

 

 

 

 

 

 

 

 

 

 

 

 

 

 

 

  렙은 일찍이 일어나 어디로든 나설 수 있도록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엘리어스뿐 아니라 그에게도 일찍 깨어 있을 이유가 없었지만 모험과 방랑, 유리하는 생활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일찍 일어난 만큼 몸을 단련하고 날카로운 화살처럼 유지하는 데에 전념했을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쉽게 유지되지 않는 신체의 한계를 그도 슬슬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그가 일찍 일어난 것은 감당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소처럼 무거운 바위를 들어올리거나 균형을 잡는 연습을 하거나 언덕길을 달리는 대신 좁은 마당을 서성이면서 어떤 종이 뭉치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전에 찾아온 손님이 건네고 간 것이었다.

 

그의 고민거리를 나타내는 것처럼, 미간의 주름은 한층 더 깊은 골을 패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날카로운 대기는 폐부를 찔러 쪼갤 만큼이나 맑고 상쾌했다. 그로 인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거처도 몸 누일 곳도 잃어버린 이들을 비웃는 것인지,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땅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똑똑

 

갑작스럽게 끼어든 미세한 소음이 생각들을 저울질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그를 건져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채 서성거리던 칼렙에게 있어서는 바람 소리에 묻혀 버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검사의 감은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익숙한 소리였다. 번개처럼 돌아선 그가 문을 열자 예상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엘리어스, 너로구나. 어서 들어오렴.”

 

“좀 들어갈게요.”

 

엘리어스는 보통 때보다 조금 더 급해 보였다. 평소보다 더 진지한 표정이었고, 평소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칼렙은 무엇인가를 직감한 듯 눈매를 좁혔다. 대문을 닫은 그와 소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문지방을 넘어 식사할 때 쓰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엘리어스는 칼렙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라드로 내려가실 거라고 들었어요.”

 

“맞아. 황녀님의 부탁이 있었지.”

 

대답하는 칼렙도, 질문하는 엘리어스도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녀는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었다. 칼렙은 아침의 손님에게 받은 종이 뭉치를 펼쳐 놓았다.

 

“너를 만나고 나서 황녀님을 보러 갔었지. 그 때 이미 내려가 봐야 한다는 결정은 거의 하고 있었어.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더 있었단다. 그래서 에를록스 원수와 한 번 이야기를 해 봐야 할 필요가 있었어. 그게 어젯밤이었지.”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길래요? 제국하고 관련이 있는 일이었어요?”

 

“맞아. 제국 때문이지.”

 

칼렙의 목소리는 제국 이야기를 할 때 순간적으로 격앙되어 있었다.

 

엘리어스는 그가 자기 앞에서는 대체로 유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기지 못하는 몇몇 감정들은 그녀를 때로는 안타깝게도 하고, 때로는 기쁘게 만들기도 했다. 소녀는 참을 수 없는 동정과 안타까움이 가슴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칼렙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 않고도 아는 듯했다.

 

“그들은 황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 바보들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모를 수 있겠니. 황도가 그런 전쟁을 또 견딜 수는 없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만 해.”

 

그는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말하려다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듯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열리려다 다시 굳게 닫혔다. 엘리어스도 더 캐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 칼렙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짐짓 태연한 척하려는 일그러진 표정이 대신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말하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건 뭐예요?”

 

“아침에 날 찾아온 사람이 있었지. 부탁할 게 있다고 하더구나.”

 

“부탁이요?”

 

부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엘리어스는 바로 떠올린 것이 있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엘리어스를 바로 쳐다♡♥♥♡ 않은 채, 칼렙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콘스탄틴 폰 파울루스 (Konstantin von Paulus) 소장이라고 해안수비대 해상작전사령관이 찾아왔단다.”

 

“뭐 하는 분이라고요?”

 

황도군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엘리어스였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칼렙은 피식 웃으며 비로소 그녀를 바라보고 돌아앉으며 말했다.

 

“함대 사령관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뭐 지금 황도에 지휘할 함대가 남아 있다면 말이지.”

 

“아.”

 

그의 말대로라면 해상작전사령관이란 자리는 이름만 거창하지 상당한 한직인 것이 분명했다. 칼렙이 종이 뭉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쪽도 내가 아라드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아마 에를록스 원수가 나하고 헤어져서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언질을 줬을 테지. 그 사람이 필요한 정보일 거라고 이걸 주더구나. 사람을 찾아 달라고 하던데……?”

 

“혹시 그 찾아 달라는 분이 휴 피츠래리 박사님이에요? 그…… 이 분이요.”

 

엘리어스는 직감적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눈치채고 그의 말을 자르며 케이프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녀는 이내 새로 찍은 듯 빳빳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 찍힌 짓궂어 보이는 인상의 남자를 본 칼렙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 어떻게 알았니?”

 

쉽게 놀라는 편이 아닌 그도 뜻밖의 소식에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반응을 통해 엘리어스는 그녀의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저한테도 오전에 찾아온 분이 있었어요. 똑 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누가 찾아왔길래?”

 

“캐롤라인 커티어스, 안트베르군 12보병여단장이라고 하시던데요. 아는 분이세요?”

 

“알지.”

 

칼렙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잠시 귀수로 수염 난 턱을 쓰다듬던 그가 이윽고 질문을 던졌다.

 

“그 작달막하고 덩치 큰 사람 맞니?”

 

“네, 맞아요. 알고 계셨어요?”

 

“알지. 그 여단 주둔지가 동문 근처에 있어서 가끔 훈련교관 일로 찾아가거든. 그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는군.”

 

“뭐가요?”

 

“그 두 명이 우릴 따로 찾아온 이유 말이다.”

 

칼렙이 휴 피츠래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엘리어스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서성거리며 말했다.

 

“그 둘이 지금 하고 싶은 건 비슷하지만 사이가 안 좋아. 커티어스 준장은 웨스피스 출신에 육군인데 파울루스 소장은 해안수비대고 귀족이거든. 원래 속해 있는 조직이 다르면 소 닭 보듯 할지언정 사이가 좋기는 힘든데, 웨스피스와 귀족이라니 얼마나 더 안 맞겠니.”

 

엘리어스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칼렙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안트베르군은 요 두 번의 전쟁에서 겐트 전역에 관여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기동야전군이야. 겐트 수비대는 독립제대이니 제외한다고 하고, 노스피스 쪽은 귀족 나리들 뒤치다꺼리나 하느라 자기네 수도는 거들떠♡♥♥♡도 않고 이튼 사령부에서는 안톤을 막느라 제 코가 석 자였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12여단은 그 중에서도 주력 여단들 중 하나였어. 그에 비하자면 해안수비대도 잘 싸운 건 맞지만 그건 육상 전투원한테나 해당되는 말이고, 함대는 애초에 카르텔 때문에 일찌감치 다 나가떨어져서 2차 전쟁이나 안톤 때에는 거의 한 게 없으니까, 커티어스 준장 눈에 파울루스 같은 사람들은 쓸데없는 자리만 차지해서 국고나 축내는 사람으로 보일 게다.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말이다.”

 

엘리어스는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핵심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출신 지역과 소속 때문에 알력이 있다는 사실, 황도군 내부에서도 카르텔과 안톤과의 전쟁에서 기여한 바가 소속 군별로 상이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갈등을 더 증폭시킨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엘리어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안타깝네요.”

 

“다들 그렇지.”

 

“왜들 그냥…… 사이 좋게는 지내지 못하는 걸까요?”

 

거의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엘리어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 칼렙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해결책을 알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동안, 햇살이 내리쬐는 밖에서 까치 우는 소리가 그들에게는 유달리 큰 소리로 들렸다. 인간사에 무관심한 듯 자연은 깨끗하고 고고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칼렙은 말을 돌리고 싶었는지 엘리어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을 섣불리 믿어서는 안 될 것 같구나.”

 

“그건 그렇죠. 그래도 두 분 다 그 소식을 전달받았다면 최소한 같은 편에 속해 있는 걸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맞아, 그럴 테지. 하지만 적어도 커티어스 말고 파울루스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어. 너도 알다시피, 다른 녀석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안수비대장 하이람 클라프는 그다지 신뢰할 만한 위인이 아니야.”

 

엘리어스는 왜냐고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람이 저질렀던 월권 행위들에 대해서라면 그녀도 칼렙과 함께 황녀의 입으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해안수비대 지상군과 함대 사이가 별로 안 좋기는 하지만 같은 조직이라 의도치 않게 정보가 오가거나 샐 수도 있을 게다. 파울루스가 귀족 출신이기도 하고. 네 말대로 우리가 아라드로 내려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들었다면 최소한 에를록스 원수는 그들을 신임하는 모양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러면 이글아이 사령관님께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어때요?”

 

“확인? 아, 그래.”

 

엘리어스는 오전부터 못내 미심쩍었던 점에 대해 마침내 언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칼렙은 엘리어스가 지적한 점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방 먹었다는 듯 낮은 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내려가기 전에 그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지. 네 말이 맞다.”

 

“칼렙이 생각을 못 하는 부분도 있었네요.”

 

“내가 무슨 백과사전이니?”

 

“저보단 잘 아시잖아요?”

 

시종 진지하던 두 사람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웃음기가 돌았다. 잠시 킬킬거리던 칼렙과 엘리어스가 거의 동시에 낡아빠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 새 정오가 가까워져 있었다. 삐걱대는 의자에서 먼저 일어선 것은 칼렙이었다. 그가 의자에 걸쳐 두었던 두터운 쾌자를 도포 위에 걸치며 조금 쾌활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토요일이긴 하지만 별 달고 있는 사람이 주말이라고 할 일 없이 늘어져 있을 리는 없지. 일단은 사령부 건물로 같이 찾아가 보는 게 어떠니? 가는 길에 점심도 어디서 좀 먹고 말이다.”

 

“좋아요.”

 

엘리어스는 생긋 웃으며 그를 따라 자리를 나섰다.

 

 

 

 

 

칼렙이 머물고 있는 장소에서 겐트 사령부까지는 먼 길이 아니었다. 그의 걸음으로 고작 십 몇 분만 걸으면 도착할 만한 장소였다. 위병소에 도착한 그들이 주말인데도 사무실에 나와 있는 운 라이오닐 대령과의 통화에서 이글아이 원수는 잠시 자리에 없으니 모셔 오겠다는 말을 듣고, 그러면 두 시간 뒤 다시 찾아오겠다는 전갈을 남기고 돌아섰을 때도 여전히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역시 여기는 없구나. 뭐 식사라도 하러 간 모양이지. 자기 부관도 떼어놓고 혼자 맛있는 거라도 먹나…….”

 

“라이오닐 씨는 오늘도 일하네요. 좀 쉬지.”

 

칼렙이 뼈 있는 농담을 던지자 엘리어스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녀의 옷차림은 케이프를 포함하더라도 초겨울의 바람을 견디기에는 별로 두텁지 않은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마법으로 몸을 덥히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칼렙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 친구가 좀 극성이라고 하더구나. 뭐 이렇게 됐으니 점심이라도 먹고 오는 게 좋겠네.”

 

“원래 그러자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칼렙이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보자……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뭐든 상관없어요.”

 

엘리어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칼렙은 그 대답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무거라도 한번 제시나 해 보렴. 결정은 하고 가야 빨리 찾지.”

 

“그럼 국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그러자. 내가 남문 시장에 괜찮은 곳을 알거든…….”

 

그렇게 결정이 나자 그들은 남문의 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욱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마침 장이 열렸는지, 파괴된 도시에서도 장시는 활발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잠시 멈추고 좌판을 구경하기도 하고, 주전부리며 튀김이며 하는 것들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질 수가 없는 아픔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할 때마다 착잡한 입맛이 올라오는 것을, 그들 둘 중 누구도 숨길 수가 없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저앉아 깡통을 앞에 놓고 있는 상이군인, 대낮부터 술에 취해 고래고래 카르텔과 귀족과 황녀와 세상 전체에 욕을 퍼붓는 취객, 무전취식을 했는지 낡은 슬리퍼로 두들겨 맞으며 황급히 쫓겨나는 남루한 차림의 일가족, 이들 모두 지극히 일부일 뿐인 것을 칼렙도 엘리어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의 부름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 모두 지나칠 정도로 잘 아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멈춰선 칼렙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한 무표정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던 반면, 엘리어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오, 두 분을 모두 뵙다니 오늘은 길일이 분명하군요. 어디로 행차하시는 길이십니까?”

 

그 소리를 들은 칼렙은 엘리어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뒤를 돌아보더니,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르겐 공, 어인 일로 친히 저잣거리까지 납신 게요?”

 

“찬거리라도 둘러볼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찬모에게 분부해도 될 것인데, 보기보다 세심하시구려. 공을 다시 봤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내일 객을 한 분 모시기로 했기에…….”

 

“그래요?”

 

비록 네빌로 유르겐이 무늬 없이 단정하고 간단한 도포와 쾌자만 차려 입고 있기는 했지만, 번잡하고 행색이 변변찮은 시장바닥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처럼 멀끔했다. 그가 질문을 물 흐르듯 받아넘기자, 칼렙은 조용히 웃으며 유르겐의 뒤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따르는 중년 여성과 종자들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 장바구니에는 대파 몇 단이며, 생선이며 하는 식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마침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혹 식사는 자셨소이까?””

 

“아닙니다.”

 

유르겐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칼렙도, 엘리어스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오기를 기대하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이리 되었으니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안 하시겠습니까?”

 

 

 

 

 

“변변치 않지만 부디 많이 드시지요.”

 

“예에…….”

 

“변변치 않다니, 황송한 말씀이시오. 감사히 들겠소이다.”

 

칼렙은 유르겐 가문의 저택이 절대로 겐트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 건물 역시 전화를 입은 흔적으로부터 복구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거택을 한 채라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으리으리하고 바깥 세상과 동떨어져 보이는 집이었다. 대문에서 그들이 앉아 있는 정자까지 오는 데에만 몇 분을 걸어야 했을 정도였다.

 

눈에 띄지 않되 소리만은 잘 들리는 곳에 앉은 악사들이 금의 현을 튕겼다. 정갈하게 가꾼 정원에 심긴 동백꽃에서 은은한 향이 풍겼다. 자연 수맥과 연결된 연못도, 작은 숲처럼 자연스럽게 늘어선 나무 몇 그루도, 칼렙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았다.

 

“한 잔 받으시지요.”

 

“기꺼이…….”

 

칼렙은 유르겐이 따른 술을 잠시 바라보았다. 손에 정확히 들어오는 크기와 모양의, 너무 화려하여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무늬가 새겨진 백자 잔이며, 불순물 하나 없이 깔끔하고 맑으면서 독하지 않을 정도의 맛만을 들인 소주며, 며칠 전 얻어먹은 황녀의 야참 상보다 정확히 한 첩 적은 반상이며, 무엇 하나 부와 명예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나 정갈하고 깔끔했다. 제국에서 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소녀에게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엘리어스는 이런 어마어마한 부의 흔적들에 꽤나 질린 듯 불편한 기색이었다. 독한 증류주임에도 불구하고, 감칠맛이 가미된 술은 목구멍을 저항 없이 부드럽게 타넘었다. 유르겐은 엘리어스의 잔에도 술을 따르려 했지만, 그녀가 손사래를 치자 그만두었다. 일순간 칼렙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뜩 하고 빛났다. 알코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르겐이 짐짓 미안한 듯 말했다.

 

“제가 괜히 두 분께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는 걸 훼방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천만에. 간단히 때우려고 하던 참인데 진수성찬까지 대접받으니 감사할 따름이외다.”

 

칼렙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근자에는 금전 있는 자들은 죄 제국 물산에 빠져 살던데, 공은 검소한 삶의 귀감을 보이시는구려. 꽤 놀랐소.”

 

“나라가 이리 어려우니 어찌 제 한 몸의 쾌락을 챙기겠습니까? 다만 여태 살아 오고 누리던 것만은 쉬이 떨쳐 놓지 못하니 그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어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칼렙과는 달리 그녀는 표정을 숨기는 데에 능하지 못했기에 일부러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어 정원 구경을 하는 척을 했다. 하지만 칼렙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치 않소. 이 땅의 문제는 공과 같은 겸손함을 배운 이들이 적다는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그와 같은 말씀에 스스로 교만해질까 두렵습니다.”

 

두 남자는 마치 오랜 친구인 것처럼 껄껄 웃으며 술잔을 부딪혔다. 엘리어스는 칼렙이 단지 힘깨나 쓰는 검사인 것일 뿐 아니라 정치가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로서는 그와 같이 얼굴에 두터운 가면을 쓰고 마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과 정반대에 놓인 미사여구들을 늘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귀족들의 수장 네빌로 유르겐을 앞에 두고 그토록 태연자약한 것 역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지치지도 않는지 문화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사자성어에 대해서, 화초의 종류, 가축의 품종에 대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엘리어스가 보기에는 전문적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피상적이고, 가볍다고 말하기엔 너무 구체적인, 별다른 영양가도 없는 대화였지만, 그녀라도 그 속에서 오가는 오묘한 알력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익숙하지도 않은 수저를 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어스의 그릇이 비고 나서도 얼마가 지나서야 두 남자의 그릇이 비었다. 드디어 네빌로의 입에서 소녀도 귀를 기울이게 할 만한 이야기가 나왔다.

 

“실은 곧 자리를 뜨려고 합니다.”

 

“휴양이라도 가시오?”

 

칼렙이 짐짓 농담인 듯 한 물음을 들은 유르겐이 허허 웃으며 답했다.

 

“만민이 도탄에 빠졌건만 어찌 가만히 자고 쉬겠습니까? 젤바로 가려고 합니다.”

 

“만민이 도탄에 빠졌다라…….”

 

칼렙은 그의 말을 되뇌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웠다. 유르겐은 안타까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어스는 그들이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을 알았다.

 

“저 무도한 카르텔의 도적 무리로도 모자라 악독한 괴수 안톤까지 이 땅을 황폐하게 하였습니다.”

 

칼렙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방이 혼란하며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아랫세계와의 교류도 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이렇듯 소중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지만, 섭정의 인을 쥔 저로서는 더욱 엄숙한 눈으로 이와 같은 시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렇소. 하늘성이라는 전설만 바라보고 살던 내가 늙어 죽기 전에 하늘길이 뚫린 것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 이 아이의 - 엘리어스를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 고향까지 발을 디딜 줄을 누가 감히 예상했겠소? 공과 같은 목민관에게는 특별히 더 그러할 것이오.”

 

유르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칼렙의 말에 동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천계의 백성을 위해서라도 한 마디의 고견이 아쉽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 드려야겠소? 공의 지혜로 부족하지도 않을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공께서 쌓은 지혜가 저의 것보다 칠 배는 두터울 터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르겐이 조용히 두 사람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잔에 담긴 증류주를 마신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침내 유르겐이 입을 열었다.

 

“어떤 빚 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지금은 부채에 쪼들려 어려운 삶을 살고 고생하고 있지만, 본래 융성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지요. 개인의 재능도 출중하여 지금의 삶보다도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을 만나 큰 화를 입고 집과 재산을 대부분 잃고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근근이 살아가다가 빚을 내어준 자가 나타나 돈을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책임지는 가족이 마침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지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겠습니까?”

 

칼렙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전히 가면 위에 떠오른 표정이었지만, 엘리어스는 그것이 좋아서 웃는 웃음과는 만 리쯤 떨어진 웃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렙은 가만히 다리를 꼬았다.

 

“그런 자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응당 일하여서 갚아야 할 것이오.”

 

“그것이 일해서 갚을 만큼의 돈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남은 가산을 내어주고 빈민을 구제하는 곳에라도 의탁해야 할 것이오.”

 

“가산을 내어주고도 모자라 구태여 빚을 거두려 한다면요?”

 

“그렇게 될 것을 모르고 빚을 내어준 자의 잘못이니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오.”

 

“빚을 준 자가 원한에 끝까지 쫓아와 목숨을 거두려 하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러하다면 오히려 궁지에 몰린 쥐처럼 빚 준 자를 죽이더라도 죄를 물을 자가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되기 전에 다른 빚을 지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이미 빚 진 자에게 누가 공으로 빚을 준단 말이오?”

 

“비싼 이자를 치르더라도 최소한 일이 그 지경이 되는 것보다는 몇 배가 낫지 않겠습니까?”

 

“작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큰 빚을 감당할 수는 없소. 빚이 큰 만큼 더 큰 대가를 치를 뿐이오. 작은 빚을 졌을 때는 스스로의 목숨만 내어 주겠지만 큰 빚을 졌을 때는 그 집에 속한 모든 생명들의 목숨을 내어 주어야 비로소 갚을 것이오.”

 

“그것은 확률의 영역에 속한 문제입니다. 예정된 파멸을 순순히 영접하기보다는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허면 일해서 갚는 것이 예정된 파멸인 것은 어찌 안단 말이오? 어찌 빚 준 자에게 인정을 구하고, 단 몇 달만 더 기다려 달라 청할 수는 없는 것이오? 일자리의 급료를 가불로 받아 일시로 갚을 수 있는 경우도 있지 않소? 모든 것은 점칠 수 없는 일이 아니오?”

 

“때로는 그렇게 정도를 따라 행할 수 있겠으나, 그리할 수 없는 현실도 때로 맞이해야 하는 법이지요.”

 

“공은 그리 생각하시는구려.”

 

칼렙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제는 마음의 가면마저 산산조각나 더욱 섬뜩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엘리어스와 함께 조용히 일어섰다. 네빌로 역시 그들을 따라 일어섰다.

 

“허면 내가 공께 해 드릴 말은 하나밖에 없소.”

 

“부디 말씀하십시오.”

 

“빚쟁이가 빚을 받겠다고 수술칼을 들고 들이닥칠 때가 머잖았소.”

 

“그렇습니까?”

 

“제국의 개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내어 쫓아 버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피로 대가를 치르리다.”

 

네빌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렙도 엘리어스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유르겐이 구석진 곳에서 대기하던 종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두 사람은 그의 인도를 따라 섭정의 저택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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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眞) 웨펀마스터 프레이

    모험단Lv.36 법도를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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