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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파 A.C.T.>-여거너 7화

7. 어둠의 선더랜드

 

 

 넓기로는 천계의 대륙 중 제일이지만, 그 태반이 바짝 마른 황무지인 웨스피스의 드넓은 벌판. 지명조차 제대로 붙지 않은 대평원의 어느 구석에 한 가족이 딱 그들 정도만 먹여 살릴 만한 작은 농장을 일구며 살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홀씨처럼 방랑하던 무법자가 운명처럼 사랑을 만나고,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려 엮어낸 아담한 둥지였다.

 들판에 드문드문 나 있는 풀잎처럼 넉넉하지는 않아도 만족하며 살 줄 알았던 그들의 행복은, 그 풀잎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쉽게 짓밟힐 수 있던 것이었다. 승냥이 떼처럼 몰려다니며 남의 것을 쉽게 손에 넣을 궁리를 하던 자들이 이 농장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잔인한 사실이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귀청을 때리는 몇 발의 총성 후에, 고단하지만 따스했던 소녀의 삶은 한순간에 나락을 향해 뒤집혔다. 인자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던 가족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바닥에 쓰러져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되었다. 핏줄 속까지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풍경 위로 어울리지 않게 환희에 찬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들에게 해를 입힌 기억은 없었다. 혹여 먼 옛날 알지도 못하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는 단언해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피를 흘리며 목숨이 ♡♥♥♡ 가는 시체 위에서 낄낄거리며 조롱당할 만큼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신에게 맹세할 수 있다.

 그 때까지 소녀를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은 그저 약탈자들의 여흥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완전한 불행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얼굴을 즐기는 금수같은 인간 역시 신의 피조물 중 하나였으리라. 머지않아 그것도 질린 듯 그녀의 이마에 총구가 들이밀어졌다. 코를 찌르는 초연 냄새와 채 다 식지 않아 체온(體溫)처럼 느껴지는 열기가 소녀를 절망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울음처럼 터져 나오는 총성을 듣는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약탈자들의 비명 소리에 소녀는 혼란과, 경외(敬畏)에 빠졌다. 마치 꿈속인 듯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불을 내뿜는 총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를 맞혀 거꾸러뜨리는 신묘한 탄환. 그리고 그 모든 조화(造化)를 두 자루의 리볼버로 곡예를 하듯 펼치는 초로(初老)의 총잡이.

 

 나락을 향해 떨어지던 소녀의 삶은 바로 그 사나이에 의해 구해졌고, 방금 전과 아주 조금만 달리진 풍경 앞에서 오늘의 악몽은 어제의 서쪽 하늘을 향해 사라졌다. 그녀가 그 때, 질렸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있던 총잡이를 어떤 눈으로 보게 되었는지는 굳이 다양한 공상이 필요치 않다.

 가족을 잃은 소녀는 그 날 이후로 총잡이를 따라 나섰다. 물론 그가 따라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고, 그녀 역시 그에게 새로운 가족 노릇을 기대하고 달라붙은 것은 아니었다. 그 살육의 밤에, 악몽을 몰아내고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부터 끌어올린 두 자루의 총. 리볼버를 다루는 방법을 총잡이에게 배우기 위해 그녀는 문자 그대로 남자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밤낮으로 졸라댔다.

 거절의 말은 셀 수도 없고, 숨을 쉬듯이 무시당했으며, 조금만 한눈을 팔면 남자는 황야의 모래바람처럼 시야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매일 밤 야영을 위한 모닥불을 피우는 총잡이의 곁으로 찾아와 짜증이 가득 섞인 한숨을 내쉬게 하는 그녀의 끈기는 그 역시 하나의 천부적 재능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마지못해 벽돌 같은 구형 리볼버 한 쌍을 건네받고, 몇 개의 자세와 동작을 따라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귀띔 정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수 년 간의 여정. 비극이라 할지 희극이라 할지 모호한 그 이야기는 웨스피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마침내 어느 소설가의 손을 거쳐 천계의 몇몇 뒷골목에서 팔려 나가게 된다.

 

“황도 분이셨군요. 저도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무법지대 소설의 걸작이라 불리는 <진정한 끈기>의 주인공인 소녀가 바로 지금 눈앞에서 숲 속을 시원스럽게 걸어 나가고 있는 여성이다. 소설 이야기를 벗어나 현실로 가더라도 총잡이로서 그녀의 이름은 꽤나 유명해서, 황도군의 근접 전술 교관으로 초빙된다는 낙점 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작스레 실종을 당하고, 사건의 진실은 두 번에 결친 카르텔의 침공 와중에 완전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지금은…별로 보여드리고 싶지 않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가 이곳으로 내려와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황도가 절대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했다고 해야 할 여러 악재가 겹치고, 적의 공세는 순식간에 황녀님이 계신 황궁의 수비마저도 뚫고 들어왔다. 지금도 그 얼굴을 일일이 떠올릴 수 있는 전우들과 동료들이 항상 엄숙하고 정갈해야 할 궁궐의 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미안해요. 제가 눈치 없는 말을 했네요.”

“아뇨. 모르시던 것도 당연하죠.”

 

 나는 황녀님을 지키지 못했다. 다른 이들처럼 적들에 맞서 명예롭게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다. 총은 빼앗기고 주먹에 때려눕혀져, 짐승처럼 묶이고 재갈이 물린 채 황녀님이 역도들의 손에 끌려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 혀를 물어 끊어버리고 싶은, 슬프고도 더없이 욕된 순간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키리 씨에게 싫은 소리 따위는 할 수 없다. 넓게 보면 그녀 역시 무법지대와, 천계전체를 둘러싼 혼란의 피해자다. 황도를 비롯해 온 나라가 다시 안정과 평화를 되찾길 바라는 마음은 결코 나에 못지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순간 가장 의지가 되는 아군 중 하나이기도 하고.

 

“겐트가 제 모습을 되찾으면, 꼭 직접 안내해 드릴게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네. 기대할게요.”

 

 약간의 그늘을 품고 있지만,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로 그녀는 나에게 대답해 주었다.

 

“아가씨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나?”

 

 그러던 와중, 모험가들 사이에서 검사로 보이는 한 남성이 어느 새 이쪽으로 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동향 사람이에요. 전에 말했었죠?”

“천계 말인가? 오호. 이 친구도 말이지.”

 

 흥미롭게 내 얼굴과 차림새를 훑어보는 검사. 격식을 차릴 것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마냥 가벼워만 보이지도 않는다. 원래는 무슨 빛깔이었는지 궁금해지는 더부룩한 회색 머리와 수염은 흔히 그런 남성에게서 보이는 무신경과 나태와는 다른 종류의 흔적을 떠올리게 했다.

 

“그나저나 라이너스도 그렇고, 모험가 나부랭이들만 온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더군.”

 

 자신을 카라카스라고 간단히 소개한 그는 처음 말을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한 듯, 그러나 한 마디의 군더더기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도 여왕님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게. 저 쪽도 지금 사정이 말이 아니야. 도시 하나가 통째로 생지옥이 되고 나서,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온 힘을 쏟고 있다고.”

“그, ‘노스 마이어’라는 곳 말입니까?”

 

 출발 전에 얼핏 들은 말에 따르면 대규모로 역병이 돌았다는 것 같은데, 지금은 온 나라의 역량이 그곳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집중되고 있다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 얕♡♥♥♡도 말라고. 다들 군인이 아니라 모험가이긴 해도, 내가 직접 가려 뽑은 정예 중의 정예만 모아서 왔으니까.”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어쩐지 묘한 소리다. 자신이 ‘뽑았다’니, 그건 마치-

 

“아, 소개가 부족했군. 이래봬도 아라드의 모험가 길드 주인장 노릇도 하고 있다고. 자네는 굳이 따지자면 군인 같기는 한데, 여기선 아니지 않나? 그럼 앞으로 자주 볼 거야.”

 

 그 말을 듣고 보니 지금 우리 앞에서 숲길을 헤쳐 나가는 다른 모험가들도 어쩐지 분위기가 다르다. 지금껏 함께 다니던 모험가들도 나름 한 실력 하는 이들이었지만, 이들은 그야말로 ‘베테랑’이라는 느낌이다. 따지고 보면 일행으로 온 키리 씨 역시 천계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총잡이고, 나머지도 그에 버금간다고 생각해 보면 절대 부족하다 할 만한 지원은 아니다.

 

“그나저나, 자네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군.”

 

 카라카스는 여전히 나를 흥미롭게, 허나 무기를 품평하든 날카롭게 응시하며 물어 왔다. 과연, 이 남자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모험가들의 집단이라면 분명 한 나라의 군대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 아라드 전역을 무대로 하고 있다면 분명히 많은 수의 모험가들을 모을 수도 있을 테고. 지금 내 처지에서는 일단 모험가로서 활동을 하며 이름을 알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군.”

 

 대답을 듣고 난 카라카스는 잠시 음미하듯 먼 곳을 보며 이름을 다시 읊조렸다. 굳이 곱씹어야 할 만큼 의미심장한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도 특이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다.

 

“저기, 이봐요!”

 

 갑자기 대열의 앞에서 걸어가던 다른 모험가가 이쪽을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말씀하신 목적지가 정말 이곳이 맞습니까?”

“네. 분명합니다.”

 

 인원이 상당히 늘어나기는 했어도 길은 제대로 찾아 온 참이다. 거기다 오늘은 현지 주민인 세리아 양도 동행했고, 길을 잘못 들었을 리는 없다.

 

“이상해요….”

 

 허나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세리아 양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안한 표정이다. 지도를 보나, 그간 몇 차례 이 길을 반복해서 다닌 내 육감으로 보나 이곳은 그락카락으로 들어가는 길목임이 분명하다. 허나, 무언가 다르다.

 조용하다. 그야 인적이 드문 숲 속이니 조용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히 소음이 적은 것과는 달리, 생명으로 가득해야 할 숲 한가운데에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훨씬 이상하다. 게다가 세리아 양과 나를 비롯해 어제 저 안쪽까지 다녀온 멤버들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어떤 것이 보이지 않고 있음을.

 

“불이 꺼졌어요.”

“불이요?”

 

 키리 씨가 약간 어리둥절하단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사건의 대략적인 개요만 알 뿐,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가 행해지고 있는지는 들은 바가 없었지.

 

“그렇다면….”

 

 이쪽의 설명을 들은 키리 씨와 모험가들의 표정이 세리아 양의 그것과 비슷해졌다.

 

“서둘러야 해요!”

 

 세리아 양의 말 대로다. 숲의 가장 안쪽을 둘러막고 있던 불이 꺼졌다는 건, 그 안에 격리되어 있던 무언가가 풀려나왔다는 것. 그리고 비노슈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좋지 않군….”

 

 카라카스 씨가 몇 개째인지 모를 주변의 풍경을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그락카락. 타우족들의 마을. 그런 마을에서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보게 될 풍경은 한 가지밖에 없다.

 시체. 시체가 있다. 우람한 덩치의 타우들이 그 몸을 다 덮을 정도의 무수한 상처를 입고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희미한 숨소리나 고통을 참는 신음소리도 일절 들리지 않는다. 일일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모두 죽은 것이다. 감히 헤아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 압도적인 죽음이 푸르른 숲의 바닥을 붉게 뒤덮고 있다.

 시체는 타우족들의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썩고 뒤틀리고, 대부분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훨씬 더 익숙한 형태다. 아니,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겠지. 저것들은 사람이다. 타우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인간들이 마치 버려진 인형들처럼 도처에 널려 있다,

 

“괜찮아요?”

 

 키리 씨마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들여다본다. 생소한 풍경이 아니다. 적과 아군이 어지럽게 뒤섞여 피바다를 이루는 이 학살의 현장은 불과 얼마 전까지 지겹도록 보아야 했던 것이기에,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압도적으로 정신을 괴롭혀 왔다.

 

“괜찮아요…그보다 어서 안쪽으로!”

“이제부턴 쉽지 않겠는데. 온다!”

 

 카라카스 씨의 말에 이어 저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트린다. 전투를 앞둔 함성도, 흉악한 병기의 가동음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퇴각을 원하는 비명이자, 안식을 찾고 싶어 하는 서글픈 울음소리다. 언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어떤 것도 없이 그저 짐승의 울부짖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저 소리는 인간의 것이다. 무기도 갑옷도, 진열도 없이 무형(無形)의 갈망만을 가지고 나아가는 군단(群團). 그건 아무리 잘 훈련된 군단(軍團)도 가지지 못한 ‘공포’라는 무기를 치켜들고 천천히 이쪽에 가까워져 왔다.

 

“옆으로 길게 흩어져! 가만히 있으면 포위당한다!”

 

 길드장의 지시에 따라 신속히 주위로 흩어져 무기를 꺼내드는 모험가들. 키리 씨와 나도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어제 산산조각 난 석궁 대신 그녀에게서 여분의 권총과 탄약을 받을 수 있었다. 낯설지만, 이곳으로 떨어질 때 챙겨온 엉망진창인 총보다는 훨씬 마음의 안정감을 주는 무장이었다.

 

[끄어어어]

 

 금방이라도 엎어질 듯 흐느적거리며 다가온 ‘인간’은 이쪽을 알아볼 만큼 가까이 다가오자 돌연 붙잡으려는 듯 양 팔을 앞으로 길게 뻗으면 달려들었다.

 ‘달려든다’고는 해도 그 속도는 이쪽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서, 그들은 차례차례 모험가들의 검과 주먹, 그리고 도합 네 자루의 총에 평범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다. 그들은 분명히 인간이었지만, 어떻게 해도 그렇게 부르기만은 주저하게 만드는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살아있는 시체’라는 주제는 픽션에서는 제법 드물지 않은 소재다. 허나 그것이 픽션으로서 인기를 끄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현 불가능한 상상의 영역이기 때문이겠지. 실제로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소리와 냄새를 풍기며 자신을 물어뜯으려는 좀비를 대면하게 되니, 앞으로 그런 종류의 소설은 읽지 못하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좀비들은 그 모습이 주는 혐오감만 극복하고 나면 나머지는 특별한 기술도 속도도 없는 직선적인 공격들이라, 격파하는 것은 간단했다. 간단하지 않은 쪽이라면, 역시 압도적이고 절대적 우위에 있는 숫자 쪽이다. 눈으로 ♡♥♥♡고 있기가 피곤할 만큼 느릿한 움직임은 그 물량에 대한 경계심을 희미하게 만들어, 아차 하는 사이 등 뒤에 놈들이 서 있는 오싹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지휘관 역할을 맡은 카라카스 씨 덕에 우리는 몇 번씩이나 포위당하는 걸 모면할 수 있었다.

 

“마스터! 이거 끝이 안 보이는데!”

 

 예상한 대로 모험가들의 실력은 굉장했다. 아무리 느리다고는 해도 좀비를 상대로 가장 위험할 것이 분명한 지근거리에서 검 등의 냉병기와, 심지어 주먹만으로도 육박전에서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좀비들은 적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푸라기와 같이, 아무 힘도 써 ♡♥♥♡ 못하고 서 있던 자리에서 무너졌다.

 허나 하나가 쓰러지면 둘이, 이윽고 더 많은 수가 사방으로 감싸고 드는 것이 놈들의 전술이자 무기였다. 아직 지치기에는 일렀지만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점차로 공간을 내주며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 명백히 보였다. 이대로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대마법진에 제 시간에 도달할 수 없다.

 

“다나!”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던 카라카스 씨가 돌연 소리를 높여 누군가를 부른다. 대열의 끝, 이곳 다음으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한 여성이 대답해 소리친다.

 

“여기 맡겨도 되겠나?”

“예!”

“좋아.”

 

 기분이 상쾌해질 만큼 짧고 명확한 대답에 살짝 미소 지은 그는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며 인원을 추리기 시작한다.

 

“우선 너와 너.”

 

 잠시 뜸을 들이고는

 

“키리 너도 같이 간다.”

“오케이.”

 

 대마법진을 살펴보아야 하는 세리아 양도 인원에 포함되었다.

 

“저도 가지요. 앞의 길은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잠시 뒤로 물러나.”

 

 우리들이 뒤로 빠진 틈을 타, 앞으로 나선 카라카스 씨는 웬일인지 들고 있던 칼을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무언가 익숙한 분위기로 한 손을 앞으로 내밀어 자세를 잡은 그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기합을 실어 그대로 내질렀다.

 

“날아가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빛줄기들은 곧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가며 겹겹이 버티고 있던 좀비들을 일격에 꿰뚫었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던 시체들의 바다가 잠깐이지만 갈라진 듯 나아갈 길이 보였다.

 

“뒤를 부탁한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그 길을 향해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몸을 날렸다. 내가 손을 잡아주고 있긴 하지만 세리아 양도 의외로 날쌘 편이었다. 쓰러지지 않은 좀비들이 우리를 붙잡으려 팔을 뻗는 것을 가까스로 뿌리쳐, 가까스로 놈들의 수비를 뚫을 수가 있었다.

 

“계속 뛰어! 멍하니 있다간 잡힌다!”

 

 워낙 요란한 방식으로 길을 낸 덕에 일행을 밀어붙이던 좀비들 중 일부와 새롭게 모여드는 놈들까지 이쪽에 주의가 쏠려버린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순식간에 포위되어 끝장이다. 돌파의 성공을 축하할 틈도 없이, 우리는 앞을 가로막는 놈들을 재빨리 밀쳐내며 숲의 가장 안쪽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속도의 차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놈들의 추격은 금방 따돌릴 수 있었다. 익숙하지만 명백히 피비린내에 찌들어버린 길을 따라, 마침내 우리는 어제 등 뒤로 했던 바로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거기에는 거대한 짐승이 있었다. 마치 원래 그러했다는 것처럼 일대의 풀들은 피를 머금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피의 주인일 것이 분명한 검은 카우. 샤우타는 마치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웅크려 꼼짝도 않고 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는 건 간단하다. 그의 주위로 그야말로 산을 이룬 좀비들의 유체가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여지조차 앗아가 버린다.

 

“너무해요 이건.”

 

 울먹이며 커다란 짐승에게 다가가는 세리아 양. 하지만 이건 내가 봐도 알 수 있다. 어떤 수를 부려도 그는 이제 살아날 수 없다. 어제의 그 때 몇 걸음 밖에서도 생생히 느껴졌던, 열기에 가까운 온기도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건 그저 바닥에 쓰러지기를 거부한 잔해일 뿐이었다.

 

“잠깐만.”

 키리 씨가 세리아 양의 곁으로 다가가, 마치 뭔가를 감싸듯이 닫힌 샤우타의 양 팔을 풀어냈다. 그 안에서 본 적이 있는 가냘픈 몸이 힘없이 이쪽으로 쓰러졌다.

 

“비노슈 님!”

“…이쪽은 아직 살아있어.”

 

 마찬가지로 온 몸에 상처를 입어 위중한 상태지만, 희미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는 게 보인다.

 

“곤란한데. 지금 부상자를 후송할 여유는 없다고.”

 

 초조한 듯이 말하는 카라카스 씨. 그의 말대로 한시라도 바삐 대마법진으로 향해야 하는 이상, 다행히 그녀가 살아있다 해도 여기에 남아 치료해 줄 만한 시간과 인원은 없다. 마음이 아프지만, 보통은 이대로 두고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허나, 우리 일행은 ‘보통’이 아니다.

 

“잠시만요.”

 

 세리아 씨는 근처 깨끗한 풀밭에 비노슈를 눕히더니, 그 옆에 서서 기도하듯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까지 본 어떤 마법과도 다른 밝고 따뜻한, 그리고 맑고 투명한 빛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 세계에 마법이란 것이 널리 퍼져 있다는 건 이제알고 있지만, 이건 마치 성자가 기적이라도 행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온 몸이 박살나 죽어가던 나도 이렇게 살아났단 걸 생각하면 진짜 어디서 성자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위태한 숨을 내쉬던 비노슈는 곧 호흡이 편안해지더니, 몸에 났던 상처도 아물고 순식간에 혈색도 돌아왔다. 눈으로 직접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기적이라 부를 회복 속도다. 이 정도면 천계로 돌아갈 때 그녀를 보쌈해서라도 데려갈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우, 으으.”

 

 가는 신음을 흘리며 비노슈가 눈을 떴다. 두 눈을 믿을 수 없는 건 카라카스 씨를 포함해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조금 전부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미안하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비노슈는 대뜸 이쪽을 향해 사과를 해 왔다. 가능하면 이쪽이 지원을 데리고 올 때까지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 힘이 다해 이 지경이 되고 만 것이라고.

 

“아뇨, 미안한 건 저희예요. 늦어서 정말 미안해요.”

 

 나를 살려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걱정과 감동이 가득 고인 얼굴로 세리아 양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이제 막 일어난 참에 미안하지만, 같이 싸울 수 있겠나? 이 상황에 따로 지켜 줄 수는 없어.”

“그래. 어떻게든 한 명 몫은 해 보겠어.”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라거나 어딘가에서 쉬고 있으라고 하고 싶지만, 온 숲에 좀비들이 퍼지는 상황에서는 혼자 내보내는 편이 훨씬 불안하다. 이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실력은 믿을 수 있고, 미안하지만 부탁하도록 하자.

 조금 위태롭지만 한 명의 일행을 더해 우리는 마침내 그란 플로리스의 중심부, 대마법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나무들이 빽빽이 하늘을 가린 숲 가운데 마치 그들이 스스로 비켜 준 것처럼 하늘을 향해 뻥 뚫려 있는 공터. 가려지지 않은 따스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어디보다도 밝은 장소여야 할 그곳은 지금은 정반대, 땅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어둠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원흉일, 말라붙고 얼어붙어서도 그 눈빛만은 살아서 번쩍이는 한 시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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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델리가없져
  • 진(眞) 미스트리스 바칼

    모험단Lv.37 깊은산속오두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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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코양이

    2024.04.232,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