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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 - 3

 

 

 

 

 

 

 

 

 

 

 

 

 

 토요일 아침, 해도 뜨지 않아 아직 어둑한 시간에 엘리어스가 깨어나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계라도 맞춰 놓은 것처럼 눈을 떴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몸을 씻었다. 온수가 나올 만큼 사정이 좋은 아파트가 아니었지만, 쏟아지는 물은 거의 얼어터질 듯 말 듯한 수도관에서 흐를 때와는 사뭇 달리 따뜻했다. 씻기를 마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에도 소녀는 바로 욕실을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녹이 슬었는지 좀처럼 잘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에서는 물방울이 물시계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본래 노동자들이나 시 외곽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살던 싸구려 임대 아파트는 이제 겐트 시에 소재한 국립 대학의 교원들을 위한 숙소가 되어 있었다. 전쟁통에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들 중 그나마 멀쩡한 건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겸 욕실을 빼면 한 평 남짓한 방은 한 사람이 지내기에도 별로 쾌적한 곳이 못 되었다. 벽지는커녕 페인트도 제대로 칠하지 않고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은 지근탄을 맞은 충격으로 군데군데 갈라져 있고, 안 그래도 손바닥만한 유리창은 깨진 곳을 대충 뜯어낸 종이 상자로 때워 놓아 채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방에 하나뿐인 전구는 시도 때도 없이 깜빡여 꺼 놓는 것이 차라리 나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탄을 뒤집어쓰고 쓰레기더미가 되어 버린 다른 건물보다는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러나 방은 그 좁은 넓이에도 불구하고 공허해 보였다. 오래된 병원 구석에나 놓여 있을 것 같은 딱딱한 철 침대 위에 대충 널브러진 옷가지와 벽에 기대어져 있는 지팡이가 아니라면 그 방의 주인을 알 수 있기는 고사하고 누가 묵고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작 엘리어스 자신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여전히 거울을 응시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이윽고 눈에 차오르는 뜨거움을 느낀 엘리어스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욕실을 나서, 팽개쳐진 옷들을 주워 입고 방을 나섰다.



 주말인데다 여전히 초겨울의 첫새벽이라 이제야 해가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한 시간이었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건설을 위해 나와 있었다. 그렇다고 해 봐야 중장비도 인력도 태부족인데다 치워야 할 잔해만 산더미였기에 일은 지지부진했다. 대개의 경우 아직 새 건물을 짓기 위해 토대를 닦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이 직접 콘크리트 더미를 들어다가 군데군데 구멍이 팬 도로를 비집고 들어온 트럭에 옮겨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겐트 중심가 부근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지만 그녀가 지내는 성곽 근처, 특히 격전지와 멀지 않은 곳은 멀쩡히 서 있는 건물이 없다시피 했다. 엘리어스에게는 생소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상의 참담함을 비웃는 것처럼, 무심할 정도로 쾌청하고 아름다운 색상의 폭포였다. 그녀는 조용히 여행용 케이프 자락을 여몄다.

 엘리어스는 칼렙이 머물고 있는 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장은 중심가와 비교적 가까운 곳,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그녀가 이곳에서 지낸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스스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알면 분명 강제로라도 자기가 지내는 곳으로 - 거기라고 대단히 나을 것은 없었지만 - 옮기라고 권할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삼십 분 정도를 걷자 하늘이 푸르게 익었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외지인, 그 중에서 보기 드문 마계인 소녀, 그 중에서도 더욱 보기 드문 ‘영웅’을 쉬이 알아보았다. 더러는 삼삼오오 머리를 맞댄 채 기웃거리기도 하고, 더러는 수군거리기도 하고, 더러는 엘리어스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사람도 있었다 - 개중에는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더러는 간단히 대답해 주고, 더러는 물리치고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미약하게나마 열기를 나눠 주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엘리어스는 그럼으로써 사소하게나마 보람을 느꼈다.

“아, 엘리어스 공! 마침 찾아가던 중이었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뜻밖에 전혀 모르는 것 같은 걸걸한 목소리가 큰 소리로 알은체를 하자 엘리어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걸음을 멈추고 부른 사람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아보아도 누군지 알 수 없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황도군 육군 군복을 빼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기저기 낡아빠지고 묵은 때가 끼어 있어 얼핏 보아서는 주위를 지나다니는 노동자들과 잘 구별되지 않았다. 웅크린 물소처럼 다부진 체격에 작달막한 키 때문에 부관으로 보이는 꺽다리 장교가 옆에 서 있지 않았다면 엘리어스도 누가 자기를 부른 것인지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어스가 자신을 알아본 기색을 보이자, 여장군은 만면에 먹이를 발견한 암곰 같은 미소를 띄우며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절 보시는 건 아마 처음이겠지요? 안트베르군 (Army of Antwer) 12보병여단장 캐롤라인 커티어스 (Caroline Curtius) 준장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부관 어거스투스 커쇼 (Augustus Kershaw) 중위입니다. 천계의 영웅을 직접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이런 아침부터, 그것도 길거리에서,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굳이 자신을 찾아온 황도군 장성을 만날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어스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안트베르군이 대관절 뭐 하는 부대인지 물어볼 여유도 없이, 그녀는 엉거주춤 악수를 받으며 옆에서 경례를 하는 커쇼 중위를 돌아보았다. 주말 아침부터 댓바람으로 출타하겠다는 상관에게 질린 것이 틀림없었는지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준장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공께서는 주말 아침인데도 부지런히도 돌아다니시는군요! 저희 부대원들도 좀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사람도 부족한 판에 군대에 떠넘겨진 일은 많아서 걱정이거든요.”

 엘리어스는 뭐라고 대답할 말이 궁했기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애초에 별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음,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얘기를 길게 하기는 그렇고, 혹시 지금 시간이 좀 있으십니까? 괜찮으시면 어디 뭐…… 좀 가셔서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네? 어……”

 커티어스의 태도가 너무나 거침없었기 때문에 엘리어스는 지금 전화도 메모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 사람이 꽤나 무례하다는 것을 상기할 여유를 가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준장은 재촉은 하지 않고, 여전히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엘리어스가 대답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가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 덕에 엘리어스는 잠시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칼렙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기는 했지만 딱히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할 것이 당장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찾아온 사람을 내치는 것도 마음이 편찮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러시다면야.”

“좋습니다! 이봐, 어거스투스!”

“예, 준장님.”

 커티어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 부관을 불렀지만, 그는 그보다 앞서서 엘리어스의 대답을 듣자마자 돌아서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엘리어스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좀 떨어진 길에는 성판이 붙은 군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걸 보고서야 전말을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차를 타고 오다가 눈에 확 띄는 엘리어스를 알아보고 급히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다가온 것이 틀림없었다. 중위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운전병이 차를 몰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느 정도 가까워져 차가 멈추자 커쇼는 다시 전광석화처럼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커티어스가 예의 커다란 암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에 쏙 드는 친구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엘리어스가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준장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차에 타고 있었다. 그녀는 민망한 표정으로 문을 잡고 있는 커쇼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항상 있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불쌍한 중위를 휴일에 더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 복잡한 거리를 헤치고 - 엘리어스가 느끼기에는 일부러 이리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 그들을 내려놓은 곳은 엘리어스의 생각과는 달리 조용히 대화를 나눌 만한 곳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장소였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공방 거리 아닌가요?”

“맞습니다! 여기서 볼 사람이 있어서요. 이봐, 어거스투스,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어 보게. 그거는 좀 나한테 주고.”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중위는 번개같이 차에서 내려서 빠르고도 소리 없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엘리어스는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차며 조심스럽게 보도에 올라섰다. 그녀의 생각대로, 그녀가 와 본 적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만남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는 속을 감출 수 없었다.

“저기, 여기는 리히터 박사님의 공방 아닌가요?”

“역시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그쪽에도 부탁을 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죠. 기왕이면 두 분 다 한꺼번에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엘리어스는 여전히 불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최소한 그녀가 아는 멜빈 리히터 박사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군가가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것은 더 싫어하고, 그 용건이 장군의 부탁이라면 더더욱 질색하는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어스는 부관에게 웬 두꺼운 서류봉투를 받은 커티어스가 성큼성큼 다가가 공방 문에 노크를 - 본인은 노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지켜보는 엘리어스와 커쇼가 보기에는 대문이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쾅쾅 두들기고 있었다 - 했을 때 대답 대신 금강랑이 튀어나와서 그녀를 납작하게 두들겨 패지나 않을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엘리어스가 보기에는 정말 의외로, 문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열렸다.

“아이쿠, 준장님 아냐! 기다렸다고.”

 그 멜빈 리히터가 버선발로 나타난 것도 놀랄 노자였지만, 엘리어스는 지금까지 그가 이렇게 흥분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커티어스는 자신이 예의범절과 규율에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젊은 과학자가 자신을 하대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 냉큼,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안쪽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갔다. 멜빈은 그 때가 되어서야 옆에 엘리어스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손짓을 하며 말했다.

“뭐야, 너도 왔구나. 들어와, 들어와. 모처럼 재미있는 얘기를 좀 하려던 참이었다고.”

“네? 예, 뭐…….”

 엘리어스는 뭐에 떠밀리기라도 하듯 문지방을 타넘어, 앞장서는 멜빈의 뒤를 따라 개인 연구실로 향했다. 투박해 보이는 문이었지만 보기와는 달리 육중한 자동문은 그들의 등 뒤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잠겼다.

 과학자들이 쉬이 정리를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닌 것은 그녀도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조명이 어둠침침한데다 집기와 부품들, 공구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어 빠르게 걷기조차 어려웠다. 비교적 밝은 등이 켜진 곳에 도달한 것은 도면과 종이 상자로 이루어진 언덕과 산을 헤치고 난 뒤였다. 준장은 거기에서 가져온 서류 봉투를 뜯어다가 토론을 할 때 쓰는 것 같은 넓고 낮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커티어스가 굳이 그것을 숨기고 있지 않았기에, 엘리어스는 그녀가 왜 멜빈 리히터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기, 이게 뭐죠? 무슨 기계의 설계도인가요?”

“맞아. 그것도 지금까지 손대 볼 기회도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물건이지!”

“그런데 뭘 하는 물건인지는 전혀 모르겠는걸요…….”

 그러나 엘리어스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가 아는 마도학자들이라면 이런 종류의 일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녀와 같은 정통 마법사들로서는 이 천계의 기술자들과 피차 이해할 수 없는 대화밖에 나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엘리어스가 그렇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커티어스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아, 이건 지금 저희가 만들려고 하는 비행정 시안입니다.”

“비행정이라고요? 하늘을 나는 탈것인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것뿐 아니라 해상과 해저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범용적이면서 양산 가능한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지요. 지금 보시는 건 상세 설계까지 마무리하고 시제기 제작을 앞두고 있는 안입니다.”

“그게 어떻게……?”

 엘리어스는 자신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뭔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멜빈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마가타 말이야. 너도 여기 처음 올라왔을 때 타 본 적 있잖아? 물론 그건 흑요정 물건이니까 이거하고 기술적으로는 많이 다르지. 그래도 비행 가능하다는 것, 물 속에서도 운행 가능할 것! 이 두 가지 컨셉을 잡는 데에는 충분했다고. 이건 정말 거대한 프로젝트야.”

“그러네요…… 대단한 일이네요.”

 그 말은 그냥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아라드에서는 흑요정씩이나 되는 마법적인 능력을 써서야 만들 수 있었던 비공정을 여기서는 처음 본 때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나지도 않아서 단지 기술력만으로 만든다는 것 아닌가? 엘리어스는 갓난아이가 글의 철자를 처음 익힌 것을 보는 것 같은 준장의 시선에 약간 당황했으나 자기가 원래 해야 했던 말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이런 일에는 제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물론 직접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부탁드릴 일이 따로 있어서 말입니다.”

 갑자기 커티어스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낮게 깔렸다. 엘리어스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이 곳까지 찾아가서 할 말이라면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실은 곧 칼렙 공께서 아라드로 내려가실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 하긴 저도 오늘 새벽에나 들은 소식이니까요.”

 이것은 그녀에게 정말로 뜻밖의 소식이었기에, 안 그래도 큰 편인 눈이 더욱 휘둥그렇게 뜨였다. 그는 이런 일정을 굳이 숨기려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빨라도 어젯밤에 결정된 일임이 분명했다. 그가 사흘 전에 자신을 만난 뒤 곧바로 황녀궁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엘리어스는 그 사이에 일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금방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잠시 후 다시금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놀라운 기색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제가 뭘 하길 원하시나요?”

“지금 당장까지는 아니지만 이 연구를 마무리하려면 꼭 필요한 사람이 있거든. 지금 다른 건 다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지만, 무장하고 연료전지 구성을 지금보다 개선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 있는 시원찮은 녀석들은 좀처럼 좋은 아이디어들을 못 내고 있어.”

“뭐…… 라고요?”

“아무튼, 유능한 화학자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런 사람이 지금 아라드에 내려가 있거든. 황녀 전하께서 아랫세계에 사절을 보내실 때 내려갔어. 그런데 내려간 지 얼마 안 돼서 연락을 일절 안 받는 바람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판이야.”

“그런가요? 도와 드릴 수는 있지만…… 그냥 모셔 오는 일이라면 굳이 저희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요?”

“그게 사정이 좀 있습니다.”

 엘리어스는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라 있는 것 같은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커티어스가 헛기침을 몇 차례 하더니 여전히 누가 들을세라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아닙니다. 뭐 칼렙 공께 들으셨을 일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군축 바람이 불어서 말이죠. 그래서 대놓고 돈을 타다가 쓸 수가 없어요. 유르겐 공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단 말씀이시죠…….”

“그래서 굳이 여기로 찾아온 겁니다. 보시는 바처럼 리히터 박사가 워낙 집구석을 좋아해서 - 멜빈이 짜증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 밖으로 불러낼 수도 없는 것도 이유지만, 그것보다도 여기, 그러니까 리히터 박사의 연구실은 황도에서 가장 전자전 보안이 삼엄한 장소 중 하나죠. 장담컨대 이 좁은 공간에 설치되어 있는 재머와 광학미채 성능은 궁궐과 중앙은행 금고의 것 이상일 겁니다.”

“그래서 여기로 오신 거군요. 하지만 여전히 제게 이런 정보를 다 말씀해 주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못 되는 것 같은데요.”

 엘리어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 어디에 충성을 바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니까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건 꽤 높은 수준의 비밀이 유지되어야 하는 프로젝트라고 생각되는데, 제가 부탁을 들어 드릴 거라고 어떻게 믿고 이런 정보를 다 알려 주시는 거죠? 지금 저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어요. 리히터 박사님이 있더라도요.”

“과연 듣던 대로 철저하시군요! 그야 물론 누가 보증을 서거나 한 건 아닙니다만 저로서는 엘리어스 공께서 설명만 들으신다면 반드시 힘을 빌려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준장의 터무니없을 정도의 낙관론에 처음에는 약간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이어서 나온 커티어스의 말을 듣자 왜 그렇게 단단히 자신하고 있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저희가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돈 들고 귀찮은 일을 하는 건 아니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제국 때문입니다.”

 제국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자마자 엘리어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군인이나 정치인 같은 종류의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역학 관계나 국가 전략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그다지 잘 알지도 못했지만, 데 로스 제국이 엮인 최근의 사건들도 있었거니와,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었던 칼렙을 통해 얻어 온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제국군 원정대가 남의 나라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유롭게 활보하는 지금의 상황이 절대로 그냥 넘겨짚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지금까지 본 적도 없던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나타난 뒤로 황녀나 군대에 대한 여론이 별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설령 정치적인 상황을 모두 배제하더라도, 칼렙이 말한 것처럼 너무 많은 천계인의 피가 흘렀다. 그녀 자신이 그 모든 비극과 죽음들을 목도했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고조된다는 것, 이대로 한 번이라도 더 전쟁이 일어나면 황도가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 정도는, 엘리어스가 아무리 정치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해도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카르텔과 안톤 사건이 종결되자 귀족이라는 돈 많은 사람들이 이스핀 섬에 다시 나타났다. 거리에서 제국군을 보는 날이 늘어나고, 안 그래도 줄어든 황도군은 더 줄어들고 있었다. 지금 이 천계를 다스릴 힘이 있는 것은 귀족들이다. 네빌로 유르겐을 비롯한 귀족들은 제국과 사이가 좋다. 그녀가 참인 것을 아는 명제들은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 그 녀석들이 미친 게 아닌 다음에야 대놓고 무슨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명색이 별인데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죠. 그래서 하는 일입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귀족원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한 거고 말이죠.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시지 않습니까?”

 엘리어스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오가는 생각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티어스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그리고 그 때쯤에는 엘리어스도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희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서 들으셨나요?”

“물론 이글아이 원수님이죠.”

“그렇군요.”

 엘리어스는 계획이 따로 없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아봐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디를 먼저 가야 하는지가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녀는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오늘 칼렙에게 전달할게요. 찾아 드려야 하는 분이 누군지 알려 주세요.”

























황녀님 드래곤 타신다 보고 어이가 없어서 재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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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v110
  • 빙화향연
  • 진(眞) 웨펀마스터 프레이

    모험단Lv.36 법도를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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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팬아트
  • 마도 (4)

    눈마살

    2024.04.163,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