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파 A.C.T.>-여거너 1화 (1)
Another Characters Tale
1. 흐르는 숲, 그란 플로리스
“자, 이제 다 되었네. 그런데 정말 이걸로 괜찮은가?”
“예. 나머지는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응급 처치를 마치고, 피가 멈춘 상처 위에 붕대를 감는다. 조금 보여주기 꺼려지는 곳에 붕대를 감는 걸 알아차린 라이너스 씨는 지금은 집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곳 엘븐가드의 집들은 상당히 신선한 발상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이곳의 주민들은 죽거나 베어 낸 나무가 아닌, 살아있고 지금도 계속 자라는 나무를 집으로 삼는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에 으레 있게 마련인 썩은 조직을 말끔히 파내고 나서 남게 되는 넓은 공간에 문을 달고 내부를 꾸미면, 집마다 제각각의 특색을 가진 아담하고 쾌적한 주택이 탄생한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집과 마을의 지붕을 이루는 나무들과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지켜주고 가꾼다. 발전이나 진보 따위는 없이 그저 살아갈 뿐인 삶의 방식이지만, 그 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천계에서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된 평화와 안식이 충만한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셨죠?”
어떤 부탁일지 짐작은 충분히 가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저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할 리는 없을 것이다. 방금 몸에서 몇 발인가의 총알을 뽑아내고, 멍과 긁힌 상처가 가득한 팔다리에 한참 붕대를 감아대고 있던 사람에게 뭔가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문화는 이쪽 세계에서도 없을 테니까.
“아직 좀 더 쉬는 게 좋다고 생각하네만….”
“이 정도는 별것 아닙니다. 우선은 도와주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아랫세계에서 만난 첫 번째 주민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는 목적도 있고. 조금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던 라이너스 씨는 결국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런 사람에게 부탁을 해야 할 만큼 꽤나 심각한 문제인 듯하다.
부탁이라는 것은 세리아라는 이름의 소녀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나이는 놀랍게도 나와 비슷한 또래인데, 인상착의에서 묘사되는 키를 보면 아랫세계의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신장이 작은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그 소녀가 홀로 이 인근의 숲으로 들어갔는데, 문제는 이곳에서 과거에 있었던 대화재로 인해 숲의 주민(…동물을 뜻하는 거겠지?) 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포악해졌다는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제 발로 거기에 간 것인가 하는 물음은 뒤로 미루고, 일단 라이너스와 이곳의 주민 몇몇이 진행하고 있는 수색에 나도 참가하기로 했다. 지금은 멸망해버린 이곳의 전 주민이라는 요정족의 언어로 ‘흐르는 숲’이라고 부르는 이 그란 플로리스에서 내가 맡게 된 구역은, 그 서쪽 끝에 위치한 어두운 숲. 머크우드였다.
그리하여 무대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이 점점 줄어들어 낮인지 밤인지도 구별하기 힘들어지는 숲의 한복판.
아직까지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세리아라는 소녀의 것도, 이 숲의 ‘주민’이라는 녀석들의 것도. 허리춤에 꽂혀 있는 리볼버는 서로에게 다행이게도 홀스터에서 나올 일 없이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다. 당연히 저것이 원래의 내 물건은 아니고, 수용소에서 빠져나올 때 카르텔 조직원 하나를 때려눕히고 빼앗은 것이다. 증오스러운 적의 무기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나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덤으로 하나도 안 고맙게도, 총 자체의 상태는 영 좋지 않다. 부품의 손질 상태도 엉망이고, 총열은 대체 어떻게 굴려먹은 것인지 끝이 나팔처럼 벌어져 있다. 이래선 코앞에서 쏴도 맞을지 어쩔지 짐작을 할 수 없다. 허나 이곳에서 내가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이것이니, 부족한 부분은 실력으로 보완하는 수밖에.
머크우드의 깊숙한 곳으로 점점 나아가자, 드디어 무언가 주목할 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생동물의 울음소리라기엔, 너무 조잘조잘 시끄럽다. 자세히 들어 보면 높이와 억양은 심하게 다르긴 해도 분명 인간의 언어다. 혹시 저것이 라이너스 씨가 말하던 ‘숲의 주민’ 들인가?
서둘러 근처에 있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 소리가 나는 쪽을 살펴보았다. 소리의 주인공들은 우선 이곳 세계의 주민답게 키가 매우 작았다. 흠, 이건 좀 심하게 작다. 기껏해야 내 무릎에 닿을까 말까 하는 정도. 녹색 피부와 뭔가 탐욕스러울 것처럼 생긴 얼굴에, 귀와 코는 또 무슨 뿔처럼 길게 제 갈 길로 뻗어 있다. 전체적으로 호감을 가질만한 생김새는 아니라고 해 두자.
상당히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꽥꽥거리는 녹색 난쟁이들은 그 행동거지로 보건대, 그들 역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 틈과 덤불 속, 작은 바위 밑까지 샅샅이 뒤지던 그들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찾는 것이 여기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특유의 발발거리는 걸음걸이로 이 구역을 떠났다. 역시나, 시야의 높이 탓인지 나무 위를 살필 생각은 하지 않는군.
라이너스 씨의 말대로 숲의 주민이 저들을 뜻하는 거라면,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이쪽에서 먼저 접근하는 건 지혜롭지 못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들키지 않도록 숨거나 피하고, 어쩔 수 없을 때라면 제압 정도만 하는 것이 좋다. 훈련생 시절 생존술 수업 시간에 배운 바 있다. 문명화되지 않은 부족이라도 쓸데없이 그들을 자극하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한다.
숲 속으로 나아갈수록 아까와 비슷한 소란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요란하게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도 있었다. 녹색 난쟁이들의 상대는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괴물들. 난쟁이들에 비하면 거대한 덩치와 육중한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을 상대로 난쟁이들은 제법 용맹하게 싸우고 있었다. 뾰족한 것이 달린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돌을 던지는 등, 무장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빈약했지만 말이다.
어쨌건 내가 끼어들 만한 일은 아닌 게 분명했기에, 최대한 무시하면서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나아갔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무언가 지금껏 듣던 것과는 이질적인 기척을 감지했다.
무언가가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소리.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억제하고는 있지만, 저것은 본능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공포의 반응이다. 그 소리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다른 나무 위에서 나고 있었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건 우리가 찾고 있는 소녀의 목소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으앗!”
그만 썩은 나뭇가지를 밟고 만 것일까, 다음 나무로 건너뛰려던 중에 갑자기 몸이 허공에서 중심을 잃었다. 다행히 이번엔 지면에 처박히는 일 없이 안전하게 착지하기는 했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르르….”
하필 떨어져도 이런 곳에 떨어지나. 방금 본 소 인간들 중 하나가 내 눈 앞에 있었다. 거기에 이 녀석은 뭘 먹고 사는 건지 덩치가 지금껏 보아왔던 놈들의 서너 배는 된다.
“우오오!”
저만한 덩치에는 무기도 필요 없다는 것인지 녀석은 그저 포효를 내지르며 양손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단지 그것뿐인데, 근처의 땅이 진동하며 내 몸은 충격파에 밀려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저거에 직접 맞았다면 두 번째 공격은 필요도 없겠지.
서둘러 허리춤의 리볼버를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사된 총알은 고맙게도 생각보다는 겨냥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맞았다. 하긴 저만한 덩치니 아무 데나 쏴도 맞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크오오오오!”
허나 문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신음소리를 내며 잠시 멈칫한 것 외에는, 저 괴물은 그다지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더 미쳐 날뛰도록 자극하는 결과밖에 낳지 않았다.
이번에는 머리에 난 뿔을 앞세워 돌진해오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고 나서, 나는 이 짓거리를 하루 종일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거의 완벽하게 혼자인 나와 반대로, 이곳의 소란은 다른 숲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금방 끌어들일 것이다. 거기에 저 나무 위에는 이번 수색의 목표 또한 숨을 죽이고 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크읏!”
허나 상황을 역전시킬 묘수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가진 화력으로 녀석을 제압하는 것은 무리고, 여기서 격투기를 거는 것은 그저 많지도 않은 수명을 급격히 재촉할 뿐이다.
“그르르….”
나대신 뒤에 있던 나무를 힘껏 들이받은 괴물이 조금 기세가 죽은 것인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나무 위에서 떨어진 빨간 열매들이 발굽에 으깨지며 바닥에 빨간 자국을 여기저기 퍼뜨렸다. 한 순간이라도 주의를 흐리면 나도 저 꼴이 되겠지.
…잠깐, 열매?
그러고 보니, 이 주변의 나무에는 어느 것 할 것 없이 열매가 한가득 열려 있었다. 무르고 즙이 많아 보이는 열매부터, 마치 비늘 같은 껍질로 덮여 있는 것.
“찾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그런 종류의 열매를 마침내 찾아냈다.
“한 번만 제대로 맞아 다오, 이 망할 총아!”
이제는 정말 이쪽을 끝장낼 기세로 달려오는 커다란 괴물. 그것을 앞에 두고, 나는 괴물이 아닌 훨씬 위쪽에 있는 지점을 향해 장전되어 있던 모든 총알을 쏟아 부었다.
마치 리볼버로 머리를 쏘는 내기와도 같은 확률로 저지른 승부수.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 속에서 저 멀리 나뭇가지들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덤으로, 내가 이런 놀이에 제법 소질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우으으….”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린 크고 단단한 열매들. 그것들은 녹음했다가 다시 듣고 싶을 만큼 경쾌한 소리로 괴물의 두개골을 강타했다. 총알을 박아 넣어도, 나무에 전력으로 들이받아도 멀쩡하던 괴물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비실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리고 나도 바닥에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방금의 공격으로도 괴물은 죽지는 않고 그저 기절하는 것에 그친 모양이다. 깨어나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 하겠지만, 우선은 달아오른 호흡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또한, 나무 위에서 벌벌 떨고 있던 우리 아가씨도 안전하게 내려 줘야겠지.
“아우우,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무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키를 가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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